엽록체에 대한 기억 / 이경주
페이지 정보
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19회 작성일 22-07-21 09:46본문
엽록체에 대한 기억 / 이경주
숲을 떠난 푸른빛의 기억이 갇힌 방으로 들어간다 / 형광등 불에 달궈진 자갈과 모래알들이 바닥에 깔리어 / 전갈이 지나는 길을 만들고 있다 / 마른 바람이 눈에 익거나 때로는 낯선 발자국들을 지우는 한낮에는 / 미세한 먹이사슬들이 잠깐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얗다 / 종일 내리쬐는 빛은 벽에 박힌 나무들의 뿌리와 / 그걸 바라보는 죽은 새들의 밥상과 / 좁은 틈새를 뚫고 머리를 든 작은 벌레들의 / 핏줄까지 하얗게 만든다 / 한번이라도 불빛에 닿은 것들은 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 오후가 저물 때면 변색의 관성은 더욱 강해져 / 누구도 아침을 기억하지 못한다 / 방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다 / 아무렇게 발을 들여 놓았다가 / 깊은 사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풍에 갇히어 돌아설 수 없다 /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표정이라고는 창백한 빛뿐인 고요한 방이 / 암흑 속을 빠르게 날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 이상하다 분명 하루가 지난 거 같은데 /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
얼띤感想文
동인 단톡방에 오른 詩 한 수다.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보인다. 문장 전체가 차분하다. 詩題 엽록체葉綠體에 대한 기억, 엽록체는 식물의 잎에 주요 기관이다. 빛을 받아 탄소동화작용을 통해서 녹말을 만든다. 즉 生命體에 하나의 주요 生命線의 역할을 담당한다.
詩題만 보더라도 얼핏, 失職에 대한 어떤 고통이 묻어 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코로나 시대를 대변한 詩로 보인다. 시에서 보면 숲을 떠난 푸른빛의 기억이 갇힌 방으로 들어간다와 저 끝에 이르면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며 단정한다. 물론 엽록체의 역할이기도 하지만, 이 社會에 社會的 역할을 담당하고 살아야 할 시민이 보이는 것이다. 실직에 대한 고통과 그 어느 곳에도 발 붙일 곳 없는 社會를 말이다.
신춘문예新春文藝 당선작當選作을 보면 하나 같이 느낀 점이 있다. 글 잘 써는 건 기본이고 사회를 반영하는 글이어야 한다는 점, 개인의 일기 같은 詩라도 사회 소수자의 아픔 같은 것을 잘 대변하거나 묘사한다는 것이겠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