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그늘 찾기 / 이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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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0회 작성일 22-08-06 21:49본문
한낮의 그늘 찾기
=이제니
너는 천변의 끝에서 끝을 반복해서 오가고 있다. 한여름의 천변은 눈멀었던 날을 비추고 있다. 천변과 낙원. 천변과 낙원. 너는 천변을 걸을 때마다 낙원을 생각한다고 했다. 출렁이는 물결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이며 뒤덮이고 있다는 기시감 속에서. 너는 눈부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픈 것을 가리고 있었다. 불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파편적으로 배열되고 있는 이미지 속에서. 물가로 나와 몸을 말리는 한 마리의 백조가 있고. 무성한 잡초가 있고. 버려진 조각들이 있고. 끝내 가닿지 못한 그늘이 있고. 결국 다루지 못한 이야기가 있고. 말할 수 없어서 말하지 못한 슬픔이 있다. 갈증과 증발. 갈증과 증발. 낱말은 발음하기에 좋은 낱말을 제 곁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가리는 것을 더는 가리지 않게 될 때. 기다리는 것을 더는 기다리지 않게 될 때. 가리는 것은 기다리지 않은 것으로 문득 드러나게 될 것인가. 여기까지 썼을 때 너는 너를 위로해주러 오던 언젠가의 발소리를 듣는다.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네 곁으로 와 멈추어서는 소리 앞에서. 더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이 중요하지 않게 될 때. 더는 기다리는 것에 의지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때. 그때. 너는 네가 기다려온 것의 중심으로 한 걸음 더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천변은 걸으면 걸을수록 한 번도 가닿지 못했던 낙원을 닮아가고 있었다. 너는 길고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한 감각 속에서 다시금 눈을 감는다. 뒤늦게 찾아오는 명료한 사실 하나를 깨달으면서. 벽이라든가 막이라든가. 벼랑이라든가 불안이라든가. 피안이라든가 피난이라든가. 낱말과 낱말의 질감을 섬세히 구분하고 구별하던 사람을 떠올리면서. 늘그막의 그늘막. 늘그막의 그늘막. 더는 만날 수 없는 얼굴 하나가 사라져가는 우리를 옛날의 장소로 불러 모으고 있다. 언젠가의 우리는 한낮의 그늘 속에서 만난 적이 있었고. 오늘 다시 오래전 그늘 속에서 천천히 늙어가고 있었다. 한여름의 천변은 보고서도 보지 못한 것으로 가득하여서 우리는 우리가 놓여 있는 전경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우리에게 속하면서도 속하지 않은 풍경이 저세상처럼 아득하게 좋았다.
―《문장웹진 2022년 6월호》
얼띤감상문
시 한 수가 어쩌면 성경보다 불교의 경전보다 더 짜릿한 맛을 던져줄 때가 있다. 마치 신을 논하지는 않지만, 시를 읽으면 한 사람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는 어떤 신적 산화물 같은 것을 뇌 꼴 뒷벽에다가 남겨 놓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순식간에 지나간 신의 흔적 같은 것이며 수레의 받침이 빠진 구체의 한 세계관이겠다. 시인께서 말한 시어, 천변과 낙원과 중심과 낙원을 닮아가는 것 그리고 벽과 벼랑 늘그막과 그늘막 이외에 가득 담은 풍경은 모두 시적 묘사를 위한 중요 시어들이다. 마치 유리와 유리창과 유리창 안의 벽과 벽에 붙은 거울, 그 사이에 보이는 어떤 그림자의 형태까지 아주 잘 묘사한다. 시의 초면과 시의 백조와 시의 경지와 시의 경지는 아니지만, 그 비스름한 어떤 존재까지도 여기서 잘 설명해 준다. 우리가 시라는 것을 써놓고 보면, 정말 잘 썼다고 생각이 들 때,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고 아! 이건 분명 내가 어디서 차용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 그것처럼 시는 그 어떤 천변의 낱말에 휘감아 돌 때가 있다. 그 경지, 사실 이러한 어떤 작용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예술의 선에 드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까지 들게 하는 시다. 시제 한낮의 그늘 찾기는 시를 좀 아는 자 어떤 변화를 주고 아니면 어떤 변화를 겪든지 천변에 이르는 그 경지는 이미 한 선을 넘는 일이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한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묘사하느냐다. 아득하다. 그 경지 말이다. 문학의 천변淺邊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야 할 그 깊고도 깊은 천변天邊 그것은 천변天變을 통해서 천변千變으로 이루어 내는 경험의 산물임을 기어코 알아야겠다. 안의 날개와 바깥의 질량 속에서 오가는 늘그막의 그늘막, 늘그막의 그늘막 다시 만날 수 없는 얼굴 하나가 사라져 가는 그 얼굴을 묘사하는, 저세상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저세상의 한 변에서 검은 눈동자 부릅떠 일순 감각을 오롯이 낚는 일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말이다. 그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느냐다. 나는 한 걸음 더 나가 이 한여름의 천변에서 도무지 천변을 이루어 낼 것 같지 않은 이 삶에서 아득히 저 천변을 순간 거닐어 보았다. 아! 기시감 같은 것이 일어 몸이 스러진다. 무너진다. 비슬비슬 내 눈가에 어린 저것은 무엇인가! 온 세상이 파편적으로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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