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의 이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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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재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78회 작성일 22-08-25 23:21본문
모음의 이중생활
김혜순
엄마가 유리 믹서에 흰 침대들 가득한 호스피스를 넣고 곱게 간다
아니면 거대한 유리 믹서가 엄마를 갈고 있나?
호스피스엔 햇빛에 떠오른 먼지처럼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비밀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엄마는 유리 믹서에 하늘을 넣고 갈 때도 있고
바다와 산을 넣어 갈 때도 있다
이제 엄마는 밀가루 쌀 야채 생선 같은 것은 상대 안 한다
엄마는 지구라는 큰 시계를 갈아 초침을 만드는 것처럼 큰 것만 간다
다 분쇄해선 나에게 한 컵 주지도 않고
호스피스 할머니들하고만 나눠 먹는다
그게 무슨 묘약이라고
내가 그 간 것을 훔쳐 먹었더니
몸이 뜨거워지고 온몸이 바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막 동굴의 박쥐가 되는 느낌이 이럴까
죽기 전에 이미 죽게 되었고
나무 산 바다가 이미 친구가 된 느낌이 들었다
흰 눈의 사전엔 희다라는 말이 없었고
파란 바다의 사전엔 파란이 없었다
흰 눈과 바다에 대한 나만 아는 앎으로 몸이 가득 차올랐다
안경을 다시 쓰면 이 모는 게 꿈이라고 할까 봐 안경을 벗었다
모든 단어의 문장은 한 음절로 치환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자음을 버린 모음 한 개였다
모음 한 개가 방 하나를 빈틈없이 가득 채웠다가
다시 다른 모음 하나가 방을 채웠다
세상에는 모음 외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얼기설기 맞추기
“이러다 곧 낫겠지” 어쩌다 잠깐 온전히 아버지였을 때 하신 말씀이다. 아직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시지 않은 상태로 정신 줄을 놓으셨고 그게 끝이었다.
모음이든 자음이든 둘이 모여 한 글자가 되 듯 아픔에는 성별도 나이도 가족끼리도 가리지 않는다. 참 우울해 지는 시다. 죽음엔 이중생활이 없다. 비밀도 없고 시도 때도 없이 살아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들어가고 나오기를 자유롭게 하는 힘을 가진 무서운 존재. 이 시에서 엄마는 이제 돈도 명예도 소용없는 호스피스 병동 즉 지구의 아주 미세한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는 중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이미 자연의 일부가 된 느낌이랄까. 모든 것을 지켜봐야 하는. 죽음 직전의 엄마의 모습을 마치 꿈처럼 여기고 싶은 딸의 애잔함이 안경을 벗음으로써 외면하고 싶은 상황의 연출이랄까
시인은 세상에 그 모음 밖에 없는 걸로 마무리 했다. 무엇으로도 대체 할 수 없는, 죽음도 자신과 엄마사이의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말하고 싶은 것을 아니였을까.
방황하고 싶은 머릿속에 잠이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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