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 편지함 / 이정록
오늘 밤엔 약수터 다녀왔어요.
플라스틱바가지 입술 닿는 쪽만 닳고 깨졌더군요.
사람의 입, 참 독하기도 하지요.
바가지의 잇몸에 입술 포개자
첫 키스처럼 에이더군요. 사랑도 미움도
돌우물 바닥을 긁는 것처럼 아프기 때문이겠죠.
그댈 만난 뒤 밤하늘 쳐다볼 때 많아졌죠.
달의 눈물이 검은 까닭은 달의 등짝에 써놓은
수북한 편지글들이 뛰어내리기 때문이죠.
때 묻은 말끼리 만나면 자진하는 묵은 약속들,
맨 나중의 고백만으로도 등창이 나기 때문이지요.
오늘밤에도 달의 등짐에 편지를 끼워 넣어요.
달빛이 시린 까닭은 달의 어깨너머에 매달린 내 심장,
숯 된 마음이 힘을 놓치기 때문이죠. 언제부터
저 달, 텅 빈 내 가슴의 돌우물을 긁어댔을까요.
쓸리고 닳은 달의 잇몸을 젖은 눈망울로 감싸 안아요.
물 한 바가지의 서늘함도
조마조마 산을 내려온 응달의 실뿌리와
돌신발 끌며 하산하는 아린 뒤꿈치 때문이죠.
우표만한 창을 내고 이제 낮달이나 올려다봐야겠어요.
화장 지운 그대 시린 마음만 조곤조곤 읽어야겠어요.
쓰라린 그대 돌우물도 내 가슴 쪽으로 기울고 있으니까요.
- 현대시학 2007 10월호
李楨錄 시인
1964 충남 홍성 출생. 공주사범대 한문교육과 졸업.
1993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혈거시대(穴居時代)〉
당선으로 등단.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 수상.
시집으로,《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문학동네, 1994)
《풋사과의 주름살》(문학과 지성사, 1996)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문학과 지성사, 1999)
《제비꽃 여인숙》(민음사, 2001)
《의자》(문학과지성사, 2006)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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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 생각>
약수터에서 만난
물 한 바가지를 통해 표출되는,
그리움의 서정(抒情)이 따스하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그리움에 얽힌 가슴앓이 한 번
없겠는가
아프다면, 아플 그것이겠지만
유연(柔軟)하고 자유로운 연상을 통해
넉넉한 사랑으로 포용(包容)하는,
시인의 따스한 가슴이 느껴진다
혼자만의 그리움이 자아내는
비애(悲哀)까지도
온몸으로 감싸안으면서 넘어서는
넉넉한 사랑
걸핏하면, 돌아서는
요즘의 부박(浮薄)한 세태에
하나도 안 어울리는 詩이지만..
눈물겹다,
따뜻하다
-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