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까. 신발을 벗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 같은 마음가짐으로 후크를 찾으러 손가락은 뒤로, 여행을 떠났다. 냄새날까. 숨쉬기에 조금은 편해질 것이다. 냄새가 들어오는 구멍에 무수한 털이 자란다. 녀석이 그곳을 주저 없이 만져 주면 오소소 돋을 것 같다. 추울까. 오갈 데 없는 눈이 거리에 내려앉았다. 녀석과 사이좋게 포개질 수 있다. 겨울에 먹는 햄버거처럼. 서로 만질 수 있다. 의심으로 빚은 채소와 고기처럼. 맛있을까. 거기에서는 늘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숨어 있던 향이 돋아났다. 좁은 틈에서 으스스한 바람이 불었다. 뒤로 떠난 두 팔 중에 하나가 사라져도 모를 맛이다. 죽어 버릴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신발 끈을 풀어야 했다. 탄탄한 줄이어야 목을 맬 수 있지만, 모든 것은 필요 이상으로 부드럽고 상냥했다. 부끄러움으로부터, 행복할까. 어리석은 손가락이 넓디넓은 뒤의 어디 즈음에 여태 트래킹 중이다. 그곳에 도착하면 늦은 오후가 되어 있겠지. 이 모든 후크를 풀어 버릴 것이다. 녀석을 사랑한다. 과연?
鵲巢感想文
자리를 옮겼다. 여지없이 구두를 벗고 반목짜리 양말이 훤히 보이는 발목을 내보이며 앉아 이 시를 보고 있다. 시는 이제 형식적인 어떤 맛에 불과하다는 것을 마치 체인점에서 찍어낸 커피를 맛본다거나 햄버거를 들고 씹는 그 맛쯤으로 말이다. 대학가 앞이라 젊은이들이 많이 오간다. 오늘은 잠시 이렇게 앉아 쉴 수 있으나 내일은 또 어떤 일로 다가올 것인지 불안한 시간을 보낸다. 스트레스는 내 몸에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가령 돌이라는 어떤 사실을 푸딩처럼 말이다. 그것은 디저트도 아닌 디저트였으며 몰랑몰랑한 어떤 개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우울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보면 세상은 비관적인 것이다. 나의 신발은 무엇인가? 시인가? 이렇게 잠시 앉아 명상을 즐기듯 시를 보며 이제는 기계적으로 닿지도 않는 도돌이표 하루를 그만두고 싶다. 아니다. 시에서 말한 것처럼 보다 상냥한 어투로 나를 들여다보자. 손가락보다는 좀 더 넓은 지면을 보며 내일을 생각해 보자. 그러면 내일은 오는 것인가? 무엇으로 오는가? 병원에 가야 할지도 모르는 일과 푸름을 지향하는 어떤 마음 하나를 지팡이의 역할로 다해야 하는 하루가 올 것이다. 답답하다. 과연, 나의 시는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잠시 앉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