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를 지나는 두 개의 바늘 =강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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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7회 작성일 22-09-22 17:45본문
오후 네 시를 지나는 두 개의 바늘
=강영은
화단과 멀어진 다음, 그 다음에도 걷겠습니다 활짝 핀 웃음을 기다리는 당신을 향해 걷다가 멈추겠습니다 걷다가 멈추는 일이 습관이라면 바람도 바람에 날리는 향기도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당신마저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나는 나를 고장 낼 것 같습니다 오늘은 바람 불고 비바람 불고 비와 바람에 섞여 춤을 춥니다 흩날리는 꽃잎, 비가悲歌입니까 그 무엇도 아니라는 듯 광장은 네모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광장은 그래서 생겨납니까 나도 광장이 될 수 있습니까 심장을 울리는 분침과 초침소리 광장의 꽃시계가 아칸더스 잎과 가시 없는 아칸더스 잎 같은 두 개의 바늘을 남깁니다 광장은 오지 않습니다 시간과 어긋나기, 돌려나기, 갈래지기, 한 통속 되기 이것이 광장의 약속이라 기다림은 광장이 피워낸 꽃입니까? 로베르 빅토르 마리 샤를 뤼프리슈* 당신의 습작한 꽃처럼 백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시계視界이고 싶을 뿐 난, 가시 면류관 같은 두 다리를 지울 수 없어요!
*로베르 빅토르 마리 샤를 뤼프리슈(프랑스, 1866~1876년)의 화가 다수의 꽃 그림을 습작 화로 남김.
얼띤感想文
오후 네 시는 나로부터 이은 죽음의 시간이겠다. 두 개의 바늘은 인식과 부재, 삶과 죽음, 소통과 막힘, 한 통속이 되었거나 아니면 지류로 흐른 면류관이거나 화단에서 멀어져 간 시간에서 광장으로 이르는 시간까지의 거리다.
아칸더스의 잎 모양은 건축양식에서 공예 의장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베르 빅토르 마리 샤를 뤼프리슈는 프랑스의 화가로 다수의 꽃 그림을 남겼다. 그것처럼 백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시계이고 싶다. 시력이 미치는 범위에 시력으로 닿는 그 세계를 말한다. 그러니까 이중섭의 ‘흰소’처럼 그가 남긴 수많은 소의 그림과 우리 민족에 잊힐 수 없는 수작이 그 가운데 나왔다는 것을 보면, 시의 세계도 마찬가지겠다. 시인께 한 편의 시, 독자께 잊히지 않는 시계다.
광장은 시어로도 참 많이 쓰는 단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하고 대중적인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곳 그것처럼 오는 시, 광장에 화젯거리로 오는 화단을 넘어 활짝 핀 웃음처럼 꽃처럼 당신을 기다릴 수 있고 당신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거리로 다만 비가가 아닌 심장을 울리는 분침과 초침 소리의 광장 그 하나의 건축 양식이 되었던 아칸서스의 잎처럼 우리가 늘 볼 수 있는 그 세계를,
두 개의 바늘을 본다. 기다림이란 광장의 속성인가? 그 속에서 핀 꽃에 깁거나 찌른 것에 그러나 가시 면류관처럼 두 다리를 지울 수 없는 시인이었다. 시의 부재겠다. 면류관처럼 가버렸으니, 다녀간 두 다리와 앉아 지켜본 두 다리는 광장처럼 시간을 보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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