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사실 =전욱진
페이지 정보
작성자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20회 작성일 22-10-08 23:24본문
여름의 사실
=전욱진
초여름도 모자벗고 인사를 다 했다
날마다 내가 오늘 본 가장 아름다운
나를 두고 그대라고 부르는 사람을
나 또한 그대라고 부르면서 그대의
그대가 되는 일은 이 세상의 좋은 일이고
여름 한철로부터 결국에 위임장을 받은
그대는 수개월 뉘엿대는 마음 이제 없이
낮곁을 늘려 여러 꽃말을 수소문한다
밤이 오면 흰 비를 데워 가져다준다
그때 나는 보채지 않고 말곁도 없이
연해지는 방법을 하릴없이 배우는데
전에는 스스로 괴롭히며 얻었던 것들이다
조용히 그러모아 그대는 녹지를 조성한다
그런 다음 군데군데 새소리를 마련하고
누구나 쓸 수 있게 해놓지만
가장 작고 촘촘한 새장은 내 몫이라
한여름에 사랑이 주인 노릇을 한다
鵲巢感想文
시는 하나의 말놀이다. 그러나 뭔가 배울 게 있어야 한다. 이 시에서 사용한 시어에 눈독이 간다. 낮곁과 말곁이다. 낮곁은 한낮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의 시간을 둘로 나누었을 때 그 전반(前半)을 말하며 말곁은 남이 말하는 옆에서 덩달아 참견하는 말이다.
읽는 내내 뭔가 빌빌 꼰 느낌이다. 그러나 독백 같은 시, 自畵自讚 같은 자위다. 초여름도 모자 벗고 인사를 다 했다. 초여름은 초여름일까, 물론 그렇게 보지 않아도 대명사처럼 와닿는 건 분명하다. 풀 草자에 여름은 열어놓은 그 느낌으로 그는, 모자라는 말도 재밌는 시어다. 모자 어머니와 아들, 어머니의 사랑, 머리에 쓴 그 어떤 물건으로 인사를 하는 건 당연히 상대에 대한 예우다.
날마다 내가 오늘 본 가장 아름다운 나를 두고 그대라고 부르면서 그대의 그대가 되는 일은 이 세상의 좋은 일이다. 그러니까 자위다. 나를 그대라고 칭하니 그대가 그대고 그대 처지에서 나를 볼 때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러면서 나를 생각하는데 생각만 해도 아득하고 나는 뭘 잘못했는가 그러면서도 잘못한 일이 너무 많고 수습할 일은 없지만,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떳떳하게 사는 인간, 참 안 됐다 싶어도 나 때문에 외로운 사람에 대한 책임은 뭐로 다 갚아야 하나 하는 일 그게 아득하다.
여름 한 철로부터 결국에 위임장을 받은 그대는 수개월 뉘엿대는 마음, 수개월 뉘엿댄다. 그건 다행한 일이다. 평생 간다. 뉘엿대는 일 말이다. 시를 사랑하므로 그러나 번듯한 시집 한 권 없는 인간, 글만 사랑해서 글이니까
이제 없이 낮곁을 늘려 여러 꽃말을 수소문한다. 꽃에 대한 상징적인 말, 꽃말 밤이 오면 흰 비를 데워 가져다준다. 데운다는 동사가 있으니 흰 비는 그에 맞는 어떤 명사형을 치환한 은유다. 그러면 흰 비는 뭘까? 백지 같은 마음 죽죽 흐르는 비처럼, 아니면 무수히 떨어진 잎으로 수북한 그 마당을 쓸고자 하는 마음이겠다.
그때 나는 보채지 않고 말곁도 없이, 그러니까 참견하지 않았다는 어떤 자소적인 말 한마디다. 군소리하지 않고 보낸 시간이었거나 거저 맹한 어떤 상태다.
연해지는 방법을 하릴없이 배우는데 전에는 스스로 괴롭히며 얻었던 것들이다. 그러니까 하루 공부였다. 딱딱한 상태가 아닌 가령 숟가락을 숟가락으로 곧이곧대로 보지 말아야 할 것들, 물론 시의 세계관이다. 단순한 시어 하나라도 말이다.
조용히 그러모아 그대는 녹지를 조성한다. 시 앞에서는 언제나 살아 있는 생물이다. 오만 생각이 다 지나가니까, 물론 여기서 시라고 했으니 말이지 연인이거나 아내거나 남편이거나 또 다른 어떤 생물의 존재를 치환하여 써놓은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
그런 다음 군데군데 새소리를 마련하고 누구나 쓸 수 있게 해놓는 것이지만 가장 작고 촘촘한 새장은 내 몫이라 한여름에 사랑이 주인 노릇을 한다. 새소리는 오른쪽 세계관, 아직 죽음의 바닥에 닿지 않은 생각이나 연한 말 그건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여기서 좀 더 나가 그것들을 가둔 새장은 더욱 촘촘하고 조밀하여야 해서 시인의 몫이란 걸 밝힌다. 그 사랑은 글을 쓰는 자 곧 그 사람이 주인인 것이다. 이것이 여름의 사실임을 말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