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한 자루 =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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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80회 작성일 22-10-18 16:31본문
연필 한 자루
=허수경
그렸다 꿈꾸던 돌의 얼굴을 그렸다 하수구에 머리를 박고 거꾸로 서 있던 백양목 부서진 벽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어깨 붉게 울면서 태양과 결별하던 자두를 그렸다 칼에 목을 내밀며 검은 중심을 숲으로부터 나오게 하고 싶었다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순간을 내미는 거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멸종해가던 거대 짐승의 목, 먹다 남은 생선 머리뼈 꼬리 마침내 차가운 눈, 열대림이 눈을 감으며 아무도 모르는 부족의 노래를 듣는 거, 태양이 들판에 정주하던 안개를 밀어내던 거, 천천히 몸을 낮추며 쓰러지는 너를 바라보던 오래된 노래, 눈물 머금은 플라스틱 봉지도 그 봉지의 아들들이 화염병의 신음으로 만든 반지를 끼는 거, 어둠에 매장당하는 나무를 보는 거, 사랑을 배반하던 순간, 섬득섬득 위장으로 들어가던 찬물 늦여름의 만남, 그 상처의 얼굴을 닮아가면서 익는 오렌지를 그렸다 마침내 필통도 그를 매장할 때쯤 이 세계 전체가 관이 되는 연필이다, 우리는 점점 짧아지면서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했으나 영영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단독자, 연필 한 자루였다 헤어질 사람들이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물속에서 영원한 목욕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한 자루였다 당신이여, 그것뿐이었다
얼띤感想文
연필 한 자루는 하나의 개체다. 이 세상을 받들며 온전한 삶을 그려나가는 개체,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겠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세계는 돌의 얼굴을 하고 있다. 분간하기가 어렵고 파헤치기 어려운 존재다. 그것을 시인은 하수구에 머리를 박고 거꾸로 서 있던 백양목,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어깨, 붉게 울면서 태양과 결별하던 자두를 그린 거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돌은 가만히 있는 존재로, 서 있지만, 그것을 대하는 우리는 붉게 타오르는 마음으로 다가가고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어떤 부담만 갖는다. 여기서 더 나가 목에 칼이 찔린다 해도 그 검은 숲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마저 그것은 내 언어의 마지막까지다. 그러나, 그것은 열정뿐이었다는 것을 너를 파악하지 못한 정주의 안개 같은 나날이었다. 하나의 연필로 너를 향한 마음으로, 너와 관여한 사회까지 그리는 거, 오직 눈물이 나오고 열에 약한 플라스틱 봉지처럼 화염병에 신음한 시간과 함께했던 어둠의 나날은 오래전에 매장한 사랑이었음을 여기서 우린 서로가 배반한 시간을 걸었고 뒤늦게 또 만나 서로의 상처를 더듬고 내일을 그렸지만, 이미 우리의 과거는 한 세계를 온전히 담았기에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리의 내일을 일깨우는 생각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다만 이 세상을 걷는 단 한 자루의 연필에 불과하다는 거, 히말라야처럼 저 높은 봉우리로 향하는 우리는 거기서 발원한 물로 하루를 씻는 일상의 음악처럼 한 자루의 연필로 그것만이 전부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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