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나무 =유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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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18회 작성일 22-10-27 16:11본문
멍나무
=유현서
나는 당신을 멍나무라 부른다 멍이 없으면 이 세상 아픈 말씀들 갈 곳이 없어진다 구멍구멍 희푸르게 앓는다 내가 뱉어낸 상처투성이의 말들이, 당신이 절벽처럼 응수한 비수(匕首) 품은 말들이 허공으로 솟구치다 안착하는 곳 그에게 수신되지 않고 당신에게 송신되어 곧바로 순해지는, 덕지덕지 꿰맨 상처 비틀거리는 노숙자도 지겟작대기 부러져라 두들겨 맞던 망아지도 수놈들의 발정에 붙이던 분녀(粉女)의 질퍽한 욕지거리도 넥타이의 주먹감자도 앳된 며느리의 눈물방울도 오지게 품고 나서야 비로소 완벽해지는 당신, 갈 곳 없는, 구중심처(九重深處)에서나 떠돌 말들이 붕붕―, 시퍼런 이파리로 환생하는 나의 플라타너스! 깊은 멍을 가진 사람만이 머물게 만든다 그의 그늘이 만평이다
―유현서 시집 『당신을 다루는 법』 (지혜, 2019)
얼띤感想文
대화 없인 살 수 없다. 그것이 상처투성이의 말일지라도 그것이 돌아 돌아서 비수 품은 말들로 허공으로 솟구친다 해도 가족이거나 국회거나 내 머문 어떤 조직에서도 국이 다르면 성향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그 국이 바라보는 성향이나 취향이 나와 꼭 맞다 하는 이는 별로 없다. 꼭 맞지 않아도 이권이 다르고 배분이 다르고 그것과 달리 오는 파까지 생각하면 정말 혼자 외딴 섬에서나 가서 살아야 한다. 어쩌면 평생 양보하고 양보하는 가운데 내 것을 조금씩 지켜나가는 현명한 노력만이 전부다.
오늘 잠깐 카페에 서서, 오시는 손님마다 작은 선물 하나씩 드렸다. 돈 주고 사 먹는 커피였지만, 무엇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손님 깜짝 놀란 모습을 볼 때면 나까지 놀랍게 한다. 거저 작은 핸드크림 하나인데, 무언가 크게 닿은 거 같다. 만평이나 되는 나의 그늘 어쩌면 먼저 다가가 그의 얼굴을 닦아야겠다. 웃는 얼굴로 오는 저 햇빛에 나의 그늘 만평에서 한 천 평, 과하다. 100씩이라도 줄여나가야겠다.
백지 한 장이 만평이라고 했던 모 시인이 생각난다. 멍이 있다면, 지겟작대기 같은 연필이 부러져라. 쓰라, 넥타이처럼 매인 삶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방법은 나를 가둔 감옥 그 깊은 곳 처한 마음이 드러내는 길, 그 수밖엔 없다. 대화도 없이 어찌 그리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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