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 =임승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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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79회 작성일 23-01-28 22:04본문
근무
=임승유
울타리를 지날 때 나도 모르게 쥐었던 손을 놓았다 나팔꽃의 형태를 따라 한 것이다
오므렸다고 폈다가
안에 든 것이 뭔지 모르면서 그랬다
살아 있다면
뛰어다녔을 것이고 뛰어다니면 어지럽고 뛰어다니면 시끄러우니까 쉬는 시간인가 보다 그러면서 붓 같은 걸로 살살 털어주면서 붓을 갖다 놓으면서 문을 닫고 나왔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창백한 도감이었는지 모른다
물가에 앉아서 생각에 빠져서 종이에 싸갖고 온 것을 풀어보다가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머니에 넣어오다니 내일은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천천히 일어날 때
쏟아지는 빛의 한가운데였다
물감이 마르는 동안이라고 했는데
아직 거기 남아서 꿈틀대고 있었다 여전히 내가 뭔가 쥐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임승유 시집,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문지, 2020)
얼띤感想文
시를 읽으니, 공자의 말씀이 언뜻 지나간다. 子曰: "學如不及, 猶恐失之." 라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울 때에는 마치 힘이 미치지 않는 듯이 열심히 하며 그렇게 하여 배운 것은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하며 소중히 간직하라."라는 말씀이다. 학여불급, 유공실지다.
시제 "근무"는 이 세상에 나와 내 본연의 의무를 다하는 것 즉 맡은 바 임무를 끝까지 해내는 것이겠다.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우주만치 넓지 않으니 이곳도 하나의 울타리겠다. 하루 한 장을 갈고닦듯이 쥐었다가 펼쳤다가 보는 너의 마음은 똑같은 실수는 하지 말고 마음은 차분히 하여 큰 욕심 없이 정진한다면 기어코 닿는 목적에 이를 것이다.
물가에 생각에 빠지곤 하여도 이정표 같은 시 한 수에 환한 빛을 보듯이 이와 같은 편안한 정도도 없을 것이다. 물감이 다 마르기 전, 붓을 더 소중히 하여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가는 길 마음 하나는 고이 다듬는 일은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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