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해동하다 =류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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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해동하다
=류인서
네 첫 나비는 가을형 노랑나비, 한번은
감정형용사들의 무덤 같은 초겨울 수목원에서 그와 스쳤다
그는 남은 꽃들에게 쉼 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그가 지루한 관계중독자쯤으로 보였다
오늘은
교차로 정지선 위를 날고 있는 그,
팔이 없고 손이 없는 이 허공은
어디에 호주머니를 두어서 그를 길러왔나
그는 이곳 원주민 같기도 하고 이방인 같기도 하다
꽁꽁 얼려두었다가 방금 꺼내 해동한 불꽃이거나,
봉인이 약한 틈을 비집고 나온 낯선 고백이거나,
그가 내미는 질문지는 가볍고 조용한 단문이네
기실 그는 어떤 허공에도 갇혀있지 않았을 것이다
부드럽게 배역을 옮겨 사는 배우처럼
그는 바람 방향을 묻지 않고 흐른다
아직 음악이 안 끝났다고 말해주는 그의 몸짓만
공기 중에 떨림으로 남는다
계간 「동리목월」 2020년 겨울호
얼띤感想文
시제 ‘기억을 해동하다’에서 기억은 마치 생물이었던 것이 무생물처럼 되었다가 다시 풀어놓는 느낌이 든다. 해동解凍은 얼었던 것이 실온에 맞게 풀어지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지난날을 잊지 않고 머릿속에 외워두었거나 저장된 사람의 생각 같은 것으로 순우리말로 고치자면 넋이나 혼이겠다.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는 말이 있다. 몹시 놀라 넋을 잃음을 뜻한다. 구천지하九泉地下라고 했다. 사람이 죽으면 넋은 땅속 깊이 돌아간다고 여겼다. 이것은 백魄이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날아가는 혼魂도 있다. 그리고 땅속이나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허공에 떠도는 것을 귀鬼라 했다. 혼魂은 하늘이 기(陽)며 백은 땅의 기(陰)다.
감정 형용사는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진저리난다거나 하는 좀 더 나열하면 즐겁거나 실망한 쪽으로 속상하거나 답답함, 더 나가 짜증이 난다는 그 무엇들이다. 이러한 감정 형용사는 그냥 불쑥 튀어 오르지는 않는다. 시 인식이 되지 않는 무덤을 바라볼 때 내비치는 살아 있는 쪽의 반응들이다. 무덤 같은 초겨울 수목원에서 그를 처음 만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의인화다. 시적 생산에 이바지할 수 있는 어떤 호주머니 속 메모 같은 것이다. 이렇게 완벽한 죽음 앞에서 나는 타자하며 속삭이는 그가 되며 꽃들은 수없이 바람에 흔들리며 손짓하며 부른다. 이를 관계 중독자쯤으로 여긴다면 과한 것인가!
교차交叉에서 차叉는 깍지를 낀 모양의 상형문자다. 오른손과 왼손 손가락마다 사이사이 낀 모양으로 수목원을 바라보고 원주민이 아닌 이방인으로 긴 산책을 한다. 고백이라 할 때 고백은 고백告白으로 쓴다. 사실대로 숨김이 없다고 생각한 바를 그대로 털어놓는 것, 흰 백白이 말할 백으로 쓰이는 혼백이라 할 때 백魄 또한 말할 백에 귀신 귀鬼로 이룬 글자다.
기억을 해동하는 일, 땅으로 꺼졌거나 하늘로 치솟았거나 혹은 공중에 떠돈 것이라도 다시 모으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떠올린다는 그 일, 그것은 부각浮刻일 것이며 각주구검刻舟求劍처럼 흐르는 강물 위 세월만 낚는 일은 아닐까!
징비록懲毖錄이라는 책이 있다. 서애 유성룡 선생께서 쓰신 임진왜란에 대한 처참한 광경을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기록이다. 후대에는 이러한 처참한 상황에 이르지 말도록 가슴에 부디 응징하며 새기며 삼가도록 쓰신 글이었다. 그러나 300년 뒤, 국권은 찬탈되었고 민족은 수난을 겪으며 풍비박산風飛雹散되었다.
어느 전쟁 전문가의 말이다. 전쟁은 역사에 기인한다. 아주 먼먼 부여에서 일어난 민족의 길, 한반도에서 떠난 백제인의 혼백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와 바이칼호수에 이른다. 이 나라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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