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장센 =윤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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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鵲巢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03회 작성일 23-06-20 12:55본문
미장센
=윤의섭
꿈속에선
공원 벤치에 앉은 아이의 뒷머리가 있었다
꿈에서 벌어진 사건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이였는데
왜 거기 앉아있었을까
허름한 골목
폐타이어 화분에 핀 채송화를 슬쩍 스쳐가는 바람은
불어야만 했던 것이다 단역배우처럼
서툰 벽화는 꼭 서툴러야 했고
담장 위를 걷던 고양이에겐 기억나지도 않을 오후겠지만
그래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잊을 수 있다는 기적으로
밥이 넘어가는 것이다
그토록 사소한 종말들
악몽을 꿨는데 아이의 뒷머리가 또 놓여있었다
채송화는 시들어 죽었고
그 곁으로 바람은 여전히 불어야만 했다
산 너머에선 천둥 치며 비구름이 몰려오고
나는 얼마나 잠깐 화창했던 생물이었던 걸까
비가 오기까지 나는 벤치에 앉아 있다
시전문 계간지 《딩아돌하》 2018 가을
윤의섭
1968년 경기 시흥 출생. 1994년《문학과 사회》등단. 시집『말괄량이 삐삐의 죽음』『천국의 난민』『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마계』『묵시록』등.
鵲巢感想文
미장센, 무대 위에서의 등장인물의 배치나 역할, 무대 장치, 조명 따위에 관한 총체적인 계획을 말한다. 인생을 단역배우처럼 느낀다면 이건 너무 슬픈 일이다. 인류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滅이 아니라 生을 위한 고군분투孤軍奮鬪 경쟁과 상호보완 또 이해충돌과 교섭 그리고 화해와 사랑 그 보살핌 속에서 마감하고 새로운 싹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희망을 기대하는 우리, 그 속에 하나의 개체로서 개체를 떠받드는 일개 개인이 아니라 개체의 표상과도 같은 인물은 희망이다. 표상과 표준에 따르는 일개라면 화창한 봄날이겠다. 그래도 누구나 잠시 잠깐의 시간 속에서 어느 한 철은 있었겠다. 필름처럼 도는 세계에서 다음의 배역은 무엇일까 한 번 생각한다. 시나리오다. 여기까지 걸었으면 여기서는 내려가야지, 잠시 쉬었다가 꺾어 도는 무대에서 초라함을 자처하며 걷는 노인, 그 미덕은 아직도 불어오는 저 바람에 있다. 가만히 벤치에 앉아 비를 맞는 것도 괜찮겠다. 다음 신을 위해서 생각한다. 그것은 죽음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온몸 뿌리쳐 일어나려는 의지에 있다. 아침, 따뜻한 커피 한 잔 손에 쥐고 있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따로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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