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각(透刻) =지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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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76회 작성일 23-06-25 21:11본문
투각(透刻)
=지 연
산도에서 길을 잃었다
팔다리뺨혀손가락발가락이 세상과 비대칭으로 자랐다
칼로 흙벽을 도려내다 쓸모없이 쓸쓸해서 그림자를 숟가락으로 떠낸다
안으로 들어오는 빛이 울렁거린다 집이 시차 없이 우주에 매달린다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불균형이 궤도를 돌아온다
벚꽃이 날린다 우주를 떠도는 행성같이 놀러 왔다가 구멍 난간에 일그러져 와글거린다
왼쪽 다리가 웃음으로 흔들린다 뭐 있잖은가 한바탕 웃고 돌아서면 휑한 거 웃음처럼 무거운 게 없다는 거
내 몸은 웃음으로 가득 차 있다 엄마는 진통이 왔을 때 냉장고 반찬들이 차곡차곡 웃었다고 했다 아빠는 엄마 울음소리가 개 울음소리인 줄 알았다고 했다
벚꽃이 떨어진 자리 잎사귀는 꽃의 의족 지금은 사라진 별빛 빛은 별의 의족 웃음은 울음의 의족
빛나는 밤 나를 파내는 구멍마다 그림자가 의족으로 번식한다
시집 『건너와 빈칸으로』 (2018. 10)에서
지연
1971년 전북 임실 출생. 2013년 《시산맥》 신인상 당선, 2016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건너와 빈칸으로』.
얼띤感想文
투각透刻은 조각(彫刻) 방법(方法)의 하나다. 재료(材料)를 뚫어 파서 모양(模樣)을 나타낸다. 뚫을 새김, 의족으로 잠시 앉았다. 산도라고 느끼지 않는 이 세계에서 나는 다만 팔다리뺨혀손가락발가락이 온통 뒤틀렸다. 띄어 쓰지 않는 그것처럼 마음은 뭉쳐 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답답하게 한 것일까! 세상만 온전하다. 온전하게 빚은 신의 투각 위에서 흙벽처럼 쓸모없이 쓸쓸하다. 그림자가 자꾸 진눈깨비처럼 질척이고 바깥은 아무리 생각해도 추운 계절이다. 그러므로 나는 흔들린다. 그러나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난간難艱에서 벚꽃은 나에게 어떤 희망이었을까? 저 지구를 이해하지 못한 그림자, 의심으로 가득한 웃음과 휑한 발걸음에 잠시 적셨던 구멍, 이 안위에서 무게만 잠시 줄인 게 아니라 잊힌 순간이었을 뿐, 삶에 진통은 다시 오고 맥주잔 다시 들며 쟁반 위 뜯어놓은 오징어 다리 하나 오지게 씹는다. 벚꽃처럼 터뜨린 이 밤, 사라진 별빛에 나는 다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길을 잃은 것처럼 산속을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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