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태양 =전동균
페이지 정보
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23회 작성일 23-06-25 21:24본문
자정의 태양
=전동균
이 책은 읽는 자의 운명을 알려준다 갓난 아기의 피로 씌어졌으나 말이 말을 뚫고 혼이 혼을 뚫고 간 흔적만 흐린 얼룩으로 남아있다
모든 그림자에게 빛을, 빛에게는 그림자를 던져주지만 일곱 개의 촛불을 켠 금요일 밤, 장님이 된 자만 읽을 수 있다 읽는 동안 운명이 바뀌고 마침내 빛이 없는 찬란을 만나 또다시 제 눈을 찔러야 한다
재 속에서 태어난 물고기 같은 책
피고 지는 나뭇잎, 연인의 젖은 입술, 부서지는 얼음조각에도 숨어 있는 이 책은 오늘 내 눈물 속에서 울고 있다 웃고 있다 불타고 있다
한때는 '자정의 태양'이라 불리었던
당신처럼
존재하지 않는, 사라지지도 않는
『제3회 윤동주서시문학상』수상작품집 (2018.11)에서
전동균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6년 《소설문학》 신인상 시 당선. 시집 『우리처럼 낯선』『거룩한 허기』『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오래 비어 있는 길』. 현재 동의대 국어국문‧ 문예창작학과 교수.
崇烏感想文
시의 세계관은 누구를 대표하는 영혼이 아니다. 깨어 있는 자의 빛과 그림자, 가령 물수건 안의 다정함과 쉽게 깨어질 수도 깨지지 않는다면 방치와도 같은 세월만 엮는다. 그 물수건과 마주한 잠시 잠깐의 다정함이었다면 그것은 검은 손이었을까 더듬거리다가 미끄러져 나간 입구에서 출구를 떠올려 보는 일 그것은 수많은 구름 떼에 가장 명확한 음성으로 듣는 가장 확실한 흔적과도 같다. 쉽게 금이 간 얼굴에서 흐뭇한 발음기호가 튀어 오르고 따뜻한 숟가락에서 방금 퍼 올린 호박죽 같은 한 모금이 이 저녁 피고 지는 나뭇잎이라면 그대는 바다 나는 물고기, 그대가 고독을 대표하는 한때 구름이었다면 나는 망치로 한 대 맞은 두부의 세계에서 망각이거나 환각, 부서지는 네 입술에서 더욱더 사라져가는 체취 굳이 오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지 오해만 쌓여 갔으니까 능멸과 멸시에서 아직도 바라보지 않는 냉소의 빛은 저기요 창문 좀 닫아주면 안 될까요? 일은 끝났으니까 조용히 일어서서 행주로 우선 바닥을 닦으며 창문 밖을 보는 저 인간, 춤추는 별 하나를 그리기 위해 혼돈은 저변에 깔려야 한다는 어느 미치광이가 손짓하고 덩달아 손짓하다가 너 딱 걸렸어 두고 보자든 흰 꽃이 흰 여백처럼 아름다움을 못 잊게 하는 저녁, 너무나 곱고 아름다워서 검은 글씨는 당신처럼 수풀 속 흰 뿔이었거나 늪에 이른 악어였거나 그래 맞아 그건 소의 무기였거나 칼날 앞에 선 목숨이었음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