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액체 같은 것 =이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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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액체 같은 것
=이제니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유년을 보냈다고 했다. 부모는 오래전에 떠나고 없다고 했다. 오래된 절망이 너를 키웠다. 그 언덕과 그 바다를 떠난 이후로도 세상은 줄곧 그 언덕과 그 바다로 떠다녔다. 너는 너에게 탄생 축하 카드를 보냈다. 죽어 두 번 다시 태어나지 말라고. 성탄일에는 크고 세모난 나무를 샀다. 나뭇가지마다 은구슬 금구슬을 매달았다. 은구슬 위에는 은 얼굴이. 금구슬 위에는 금 얼굴이. 밤의 나뭇가지에는 밤의 새들이 앉아 있었다. 나뭇가지는 천천히 말라가고 있었다. 슬픔은 액체 같은 것. 울고 나면 목이 마르다는 것. 점점 말라가면서 한 줌의 흙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띤感想文
풀잎의 저항[崇烏]
검붉은 들판이 보이는 절벽 위에서 장년을 보냈다. 아버지는 몽둥이에 맞아 죽었고 그전에 어머니는 발길에 차여 죽었다. 절벽과 거친 산비탈이 잠시나마 나를 옹호하고 보이지 않는 장래를 가름했을 뿐이다. 몇 년 아니 며칠 아니 몇 시간이 흐를지도 모르는 이 암담한 시간 속에서 내리쬐는 햇볕은 햇볕이 아니었고 내리는 한줄기 비는 빗물이 아니었다. 산줄기 헤매며 풀뿌리 캐는 일조차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살아 있으니 움직이는 허기의 반란 같은 것 또 어디선가 들려오는 절벽의 외침과 저항, 순간 공중에서 돌덩이 하나가 뚝 떨어지고 그간 믿었던 지붕이 폭삭 내려앉았다. 더는 쥐어짤 삼베 적삼 땀방울 같은 것은 없을 것이므로 댕기 머리 하나 등골에 업고 돌처럼 던졌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다. 오래된 인연이기도 하고 사랑의 경외감을 불러오기도 하는 시의 본질적인 끈이기도 하다. 언덕은 무언가 기울어져 있거나 높아 보이기도 하지만 내 유년을 잠시 지켜주는 미더운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덕은 오래전에 떠났다고 했다. 그것은 하나의 절망이며 세상은 줄곧 그 언덕을 만들며 마치 바다를 저어가는 목적지 없는 하나의 배처럼 삶을 잇게 했다. 성탄일은 누구나 한번 스쳐 지나가는 과정 나무처럼 올곧게 서고 싶은 마음과 나뭇가지처럼 올곧게 뻗어 나가려는 의지 같은 것, 거기에는 늘 인연이 있었고 그 인연은 또 말라가고 있었던 그 시절이 있었다.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치열하고 경쟁적이라는 것을 망망 바다를 보며 한 방울의 액체를 보태어 본다.
PIN 013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이제니 시집 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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