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처럼 북처럼* =송재학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시처럼 북처럼*
=송재학
단풍이 찬란할 때도 울지 않는 북이 있다 붉은 북은 쉬이 울지 않는다 울어야 할 때 불콰해지면서 잎을 죄다 떨어뜨리고도 울음을 시작 못하는 북이 있다 늘씬하게 두들겨야 떨리는 막면이라면 북이라 할 수 없다 두들기지 않아도 온몸이 떨리고 두들겨도 울지 않는다면 능히 북이라 할 수 있다 설핏한 막면이 찢어져도 생을 기워서 울부짖는 북이라면 감히 북이라 떠받들 수 있다 왜 북에게 손발 대신 심금이 필요할까마는
*조식의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에서 착안했다.
얼띤感想文
단풍이 찬란할 때, 이는 한 시기의 절정기다. 가을이라는 암묵적이었을 때를 가리키며 인생의 절정기이자 산을 뒤덮는 그때를 말한다. 북은 역시 울림을 표현하는 보조적인 시적 도구다. 북(鼓이자 冊이다.) 북은 북이지만 여기서 시인은 붉은 북이라 더욱 색채를 가한다. 붉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익었다는 것이겠다. 빛깔이 고추처럼 되는 것도 있겠지만, 고추처럼 익었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잎을 죄다 떨어뜨리고도, 호호 단풍이다. 한 면의 울림 같은 것 그 면면을 잇다 보면 단풍나무가 되는 것처럼 한 나무의 온전함은 여기에 있겠다. 시인은 늘씬하게 두들겨야 떨리는 막면이라면 북이라 할 수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누가 묻는다. 당신, 이 문구는 왜 이렇게 썼어? 무엇을 비유한 건지 무엇을 얘기하는 건지 소신껏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겠다. 한낱 쓰레기 같은 것. 그러므로 두들기지 않아도 온몸이 떨리고 두들겨도 울지 않아야 능히 북이라 할 수 있겠다. 한 권의 시집 완성은 이에 놓는 일이다. 설핏한 막면이 찢어져도 생을 기워서 울부짖는 북, 그것은 손발 대신 심금으로 닿았다면 진정 북이라 할 수 있겠다. 에고! 부러운 일이다.
나는 여기서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문구가 언뜻 지나간다. 공자께서는 주역을 참 좋아했다. 책의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지고 세 번을 이었다는 말, 그러한 책을 갖는다는 것은 시인으로서 가히 욕심낼 만한 일이겠다. 그러한 욕심은커녕 하루 편히 지낼 수 있는 가벼운 도전과 거기서 오는 성취감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문학동네시인선 169 송재학 시집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040p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