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박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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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박연준
밤은 검은 점들이 모여 우는 종이다
그 속에서 별들은 노랗게 떨다 흐려진다
한밤중 구석에서 잠든 신발들은
밤이 알맹이만 삼키고 뱉어놓은 빛의 껍질들
한 덩이 묵직한 사과처럼
천천히 굴러가는 지구 곁에서
검은 표피를 펄럭이며 자맥질하는 밤
어둠은 갈퀴가 커다란 발로
온 세상 골목들을 몰고 다닌다
얼띤感想文
참 재미나게 쓴 시다. 여기서 밤은 시 객체다. 그러니까 밤을 밤으로 인식하여 읽는다면 많은 혼돈이 올 것이다. 하나의 지시 대명사라든가 아니면 인명처럼 읽으면 이해가 쉽다. 그러니까 밤은 시 주체와 대조적인 것으로 독자의 측면에서 두고 읽는다면 앞뒤 막힘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검은 점들은 시가 되지 못한 어떤 기형적인 형태를 취한다. 종은 종種(씨앗)이자 종從, 물론 굳이 한자로 표기한 것이지만, 순수 우리말 종이다. 그러니까 별과 상반된다. 노랗게 떨다 흐려진다는 말, 참 재밌다. 무언가 인식에 가까웠으나 인식하지 못하고 나가버린 경우다. 사건으로 치자면 미수에 그친 것이다. 팍 죽거나 죽일 수도 있었던 상황, 밤은 그렇게 나가버렸다. 다음에 나오는 신발도 참 재밌다. 우리가 신는 그 신발과 신의 발과 겹친다. 한마디로 별의 발이다. 그 뒤, 더 자세하게 진술해 놓고 있다. 밤이 알맹이만 삼키고 뱉어놓은 빛의 껍질이라 했다. 그것이 신발이다. 그러니까 밤이라는 얘가 무언가 깨친 건 분명하다. 한 덩이 묵직한 사과처럼 사과沙果가 아니라 사과謝過다. 그렇지만 사과謝過처럼 닿는 사과沙果도 맞다. 천천히 굴러가는 지구 곁에서, 사과나 지구는 하나의 구체라는 특성을 가진다. 지구는 하나의 갈래다. 좌파 우파 그러는 뜻에서 또 한쪽이 생긴 셈이다. 검은 표피를 펄럭이며 자맥질하는 밤, 어지간히 용을 썼는가 보다. 하나의 별, 한 편의 작품은 그리 쉽게 나오지 않는 법, 그것의 뒤 배경을 어둠이라 하면 갈퀴가 커다란 발로 온 세상 골목들을 몰고 다녔다 하니 가히 짐작이 간다. 여기서 골목은 세세한 어떤 정확성 아니 예리한 눈빛 같은 것으로 놓치고 싶지 않은 구우일모九牛一毛와도 같을 것이다.
문학동네시인선 028 박연준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0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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