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죽 =이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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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죽
=이덕규
어느 가난한 흰빛의 최후를 수습한, 이 간결하고 맑은 슬픔은
결백을 달이고 달여 치명에 이른 순백의 맑은 독 같아서
험하게 상한 몸속의 사나운 짐승을 제압하는 일에 쓰인다네
차마, 검은 간 한 방울 떨어뜨려
흐린 제 마음 빛으로나 어둡게 받아야 하는 청빈의 송구한 맨살이라네
얼띤感想文
시가 간결하면서도 정갈하다. 부드러우면서도 소박하다. 거기다가 흰색의 묘한 아우라까지 몰려온다. 백의민족 유난히 흰색을 좋아한 우리 민족이었다. 농경문화 속에 백의와 백미는 순수 결정체였다. 하얀 쌀밥이 아닌 죽,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느냐며 이 다 죽어가는 병자에게 떠먹이는 죽, 그 하루를 곱씹는다. 죽은 쌀로 빚는다. 한 톨의 쌀은 가을의 상징이자 우리 몸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에너지를 제공한다. 시제 ‘흰 죽’을 나는 지금 말끔히 떠먹는 중이다. 병자에게는 흰 죽보다 더 나은 음식은 없을 것이다. 병자가 병자가 아니듯이 병자가 병자인지도 모르고 사는 나, 오늘 아침은 이 흰 죽 한 그릇에 눈물이 난다. 맑은 슬픔에 한 산을 넘어 고요하게 빚은 어느 한 물고기의 어죽과도 같은 순백의 맑은 독 같아서 오늘 하루 무슨 죄를 지을 거 같은 내 손모가지에 자꾸 힘만 들어가는 거 같아서 차마 그냥 지나쳐 가지 못해 기어코 검정 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만다. 풀 죽어 있는 이 흰 죽 한 그릇에 구태여 나까지도 소금기 어린 검정 간 한 방울 떨어뜨려 원기를 찾는다.
오늘 하루 시작을 알리면서,
문학동네시인선 189 이덕규 시집 오직 사람 아닌 것 0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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