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석조전 =안희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밤의 석조전
=안희연
그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밤의 석조전.
낮에는 가본 적 있다. 모든 것이 매끄럽고 선명했다. 기둥의 수, 창문의 투명도, 호위무사처럼 서 있는 나무의 위치까지도,
낮엔 다 볼 수 있었다. 돌인지 자갈인지 모래인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밤이어야만 했다. 백 년 전의 사람들, 백 년 전의 비, 백 년 전의 쇠락 앞으로 나를 데려간다면
모든 돌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고. 나는 이 거대한 돌이 말하게 하고 싶었다.
티켓을 끊고 들어간 밤의 석조전은 인공적인 빛에 휩싸여 있었다. 야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밤의 석조전이 감추고 있는 밤의 석조전으로 들어가려면.
눈은 들여다볼 수 있을 뿐 열지 못한다. 닫을 수 있을 뿐이다.
여러 겹의 달빛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한 사람이 눈을 감았다 뜨는 소리는 몇 데시벨일까. 꽃병 속에서 줄기가 짓무르는 소리는?
몇 걸음 못 가 돌아봤을 때, 아닌 척 눈을 부릅뜨는 밤이 보였다. 실핏줄이 드러나 피곤해 보이는 눈이었다.
문학동네시인선 214 안희연 시집 당근밭걷기 042-043p
얼띤感想文
석조전이라고 하면 돌로 지은 전각이다. 대한제국 말기 1897년(광무 원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에 완공되었으니 대한제국과 역사를 함께 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는 시니까, 시의 고체성을 대변해서 본다. 그러니까 밤의 석조전이라 했으니 석조전은 시를 상징하는 말이며 시적 자아다. 그러면 밤은 시적 객체가 된다. 밤의 석조전이니까 소유격으로 시 독자를 위한 한 편의 글쓰기다. 낮은 시 인식으로 깨어 있는 시간을 이와 반대는 밤으로 인식 부족이나 어두운 눈빛을 상징한다. 백 년 전의 사람들, 백 년 전의 비, 백 년 전의 쇠락 앞으로 나를 데려간다면 이는 시의 생명력으로 내가 쓴 시가 혹여 백 년 후에 읽힌다면 그만큼 시인의 명예는 따로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시인 이상의 시는 여전히 우리에게 사랑받는 시처럼 말이다. 모든 돌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고, 나는 이 거대한 돌이 말하게 하고 싶었다. 여기서 돌은 시적 객체다. 밤과 돌은 그 성질이 같은 셈이다. 돌이 좀 더 진행한다면 석조전처럼 멋진 시가 되겠지. 눈은 들여다볼 수 있을 뿐 열지 못한다. 닫을 수 있을 뿐이다. 이 시에서 가장 압권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고종께서 석조전을 왜 지어야만 했을까 하는 그 마음은 알아야겠다. 19c 말, 서구열강의 시대와 아직도 봉건제도의 틀을 못 벗은 조선이었다. 고종은 쇠약한 국력을 회복하려고 무척 노력하셨지만, 역시 힘은 역부족이었다. 개화의 속도와 밀려오는 물결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시간은 그때 이후로 120여 년이나 흘렀다. 여전히 등불 앞에 놓인 한 국가를 본다. 역사를 생각한다면, 동북공정과 친일사학(植民史觀)의 토대인 강단 사학을 보면 말이다. 역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했다. 역사는 미래학이라고도 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