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유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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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유종인
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 발톱을 툭툭 깎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 날 삼천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예전에 파놓고 쓰지 않는 낙관 돌들 이마에 붉은 인주를 묻혀 흉흉한 사회면 기사에 붉은 장미꽃을 가만히 눌러 피울 때가 좋다
아무래도 굴풋한 날 당신이 푸줏간에서 끊어온 소고기 두어 근 핏물이 밴 활자들 신문지째로 건넬 때의 그 시장기가 좋다
이젠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거기 대보는 오후의 적막이 좋다
문학동네시인선 215 유종인 시집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 018-019p
얼띤感想文
신문은 시의 총체적인 개념이겠다. 그러니까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시의 시사성보다는 비록 쓸쓸할지라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마음 한 자락처럼 자리하는 시 시의 포용성으로 말이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 발톱을 툭툭 깎아 내놓을 때가 좋다. 시가 내포한 그 어떤 의미도 무관한 시의 본색을 드러낼 수만 있다면 시의 포옹으로 닿는다. 어느 날 삼천 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시의 생명력이다. 예전에 파놓고 쓰지 않는 낙관 돌들 이마에 붉은 인주를 묻혀 흉흉한 사회면 기사에 붉은 장미꽃을 가만히 눌러 피울 때가 좋다. 시의 인지성이다. 아무래도 굴풋한 날 당신이 푸줏간에서 끊어온 소고기 두어 근 핏물이 밴 활자들 신문지째로 건넬 때의 그 시장기가 좋다. 시의 쟁의성이다. 이제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거기 대보는 오후의 적막이 좋다. 시의 귀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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