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카의 세계 =변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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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카의 세계
=변윤제
이 동물은 햇살을 담기 위해 길러집니다. 그 속엔 거울이 있고, 고원이 있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다시 바라보면,
안개 속입니다. 안데스 고원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알파카. 흉곽에 구름을 충전하고 싶습니다. 손금이 달라질 때마다.
내비게이션을 켜듯 길을 잃고 싶어요. 등 뒤를 더듬거리면 분명 문이 있는데, 열리지 않습니다.
병원에 갈래요. 엑스레이를 찍을래요. 내 속에 들어온 구름의 자잘한 속살까지 엿듣고 말래요.
뢴트켄 사진을 전구에 구겨 넣자. 창밖에 산맥이 펼쳐집니다. 뼈를 읽어주는 빛. 환함이 말을 겁니다.
귓속말을 바라보는 일. 어쩌면 늘 하는 일. 두근거림 속에 더 이상 동참만 하고 싶진 않아요.
세상의 끝을 관람하고 싶었는데, 그게 알파카인 걸까요? 홍차를 마시면 가슴 안에 불이 들어오고.
엑스레이 속에 해가 떠오를 겁니다. 온 방이 타오를 겁니다. 물위에 불이 붙을 정도로. 눈이 멀 것 같은.
모두가 앞을 못 본다면 도리어 세상이 눈 뜬 일. 그때도 가로지른다면
고기를 씹으면 눈 감아도 빛이 보이고. 이것은 오래된 중얼거림.
몽실한 머리를 보세요. 귀여움이고, 그러니 잔인함이고. 불랙홀을 예수라 믿으며 자신을 파고든 사람들처럼.
소용돌이칩니다. 사라지지 마세요. 모두 다 우연이니까요. 알파카의 털 속으로 파도가 치고, 복슬복슬 물살을 들이마시면,
이 거짓말은 전부 겪은 일입니다. 눈 뜨면 변기 위에서의 주절주절, 커피숍에서 안데스 고원으로. 새로워지라니 참 진부한 얘기였군요. 다시 눈 뜨면 으악으악.
문학동네시인선 205 변윤제 시집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 058-059p
얼띤感想文
여기서 알파카는 시적 주체로 일종의 활유법으로 쓴 시작법이다. 알파카에다가 시적 마음을 심는 일, 그 마음을 독자가 바라보고 읽는다면 어떤 작용이 일어날까? 작가의 마음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알파카라는 동물적 기만 심는다면 말이다. 이 동물은 햇살을 담기 위해 길러진다. 그러니까 햇살은 시적 객체가 되는 셈이다. 오로지 독자를 위한 글쓰기라는 사실, 그 속엔 거울이 있고 고원이 있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자아를 비춰보듯 하루의 거리를 반성하듯 언제 깨치고 언제 함몰했는지 기술의 영역을 제공한다. 여기서 머리카락은 검정을 상징한다. 물론 이 시 아래로 검정을 상징하는 시어는 여러 개가 있다. 몇 가지 얘기하자면, 길과 산맥 그리고 뼈와 귓속말, 고기와 블랙홀이다. 안개 속이다. 언제나 눈 뜨면 까마득한 세계 그것은 시적 세계관이며 이를 현세와 통하는 것은 하나의 창으로 시인은 제시한다. 창밖에 산맥이 펼쳐진다고 했으니까, 산맥, 그곳은 자잘한 속살까지 펼쳐져 있을 것이고 일종의 귓속말처럼 알파카와 동참할 것이다. 뢴트켄 사진과 전구, 전구는 구체다. 구체는 완벽을 상징한다. 물방울과 구슬과 동그란 형태를 갖춘 것은 모두 이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뢴트켄 사진처럼 시를 쓸 수 있다면, 하루의 뼈는 흘러내림이 없이 하늘만 곧추세워 볼 수 있겠지. 또한 그 뼈는 오른쪽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흘러내리지 않게 반듯하게 말이다. 그러나, 한 세상의 끝은 더는 보기 싫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늘 반복되는 일 아침이 있으면 구름으로 푹 적셨다가 비처럼 내리는 알파카, 눈 뜨면 변기 같은 무리와 무리에서 자아는 늘 잃고 마니까. 그러니 다시 눈 뜨면 으악으악, 비명 아닌 비명을 지르고 온 방은 타오르고 고기만 씹는 일, 그것은 늘 반복적이다. 정말 새로운 세상을 맛보고 싶다. 협곡과 절벽이 아니라 잠시 돋움이었다가 뛰어오르는 그런 날개와 같은 눈 깨는 날, 구름은 날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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