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임승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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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임승유
레몬 한 망 사갖고 와서 베이킹소다 푼 물에 씻은 후 말리는 동안 유리병을 삶는 사람이라면 여름에 레모네이드나 하이볼을 마시려는 사람일 테고
레몬 한 망 사갖고 와서 침대에 쏟아놓고 양손에 하나씩 쥐어본다거나 레몬 옆에 레몬처럼 누워본다거나 레몬이 레몬 향에 휩싸이듯 몸을 둥글게 말다가 생각난 듯 레몬 하나를 들고 나와 창틀에 올려놓는 사람이라면
당분간 레몬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테고
너무 덥다며 창문을 다 열어놓고 레몬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레몬에게서 레몬을 떼어내려고 이것 저것 시도하다가 잘 안 돼서 그냥 레몬한테 레몬을 줘버리는 것이다
문학동네시인선 213 임승유 시집 생명력 전개 066p
얼띤感想文
성능이나 품질이 떨어진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레몬에다가 흔히 비유한다. 여기서는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아니다. 그러면 레몬은 무엇을 상징했을까? 상큼하고 시큼한 맛 레몬, 생각만 가져도 군침이 돈다. 어떤 이는 이 시큼한 맛을 좋아해서 카페에 오면 레모네이드만 주문하고 하이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나, 레몬은 멍청하게 앉은 뒷문을 열어준다. 바닥에 덮은 푸른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 나무처럼 하늘을 바라볼 때 댕강댕강 자를 수 있는 레몬의 뒷문 그건 아무도 모른다. 오로지 유리병을 삶는 사람이라면 가끔 레모네이드나 하이볼을 마실 수 있겠거니 그렇다. 레몬 한 망 사서 와서 어디든 펼쳐놓는다면 뒷문은 지옥이겠다. 아내는 지문이 나가고 양동이에는 그 껍질로 넘쳐나겠다. 지금은 단지 한 망의 레몬이 아니라 단 한 개의 레몬만 생각하자. 레몬은 감자깎이 칼로 빗을 수 있을까 하며 무를 깎지만, 푹 삶은 무채는 국수에 좋다. 야! 그런 게 중요할 때가 아니잖아? 일요일은 레몬만 넘쳐나고 레몬은 그 어디에도 빈자리 하나 없고 기어코 속을 모르는 그 껍질 속에서 시큼한 레몬즙만 짜고 짜다가 손 다 비튼 손목만 날아간다. 레몬은 레몬에다가 레몬을 줘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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