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기(乾期)1 =허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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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기(乾期)1
=허 연
가끔씩 오는 바람과 까마귀와 까마귀가 둥지를 튼 웃자란 나무는 동일한 리듬을 갖고 흔들리고 있었다. 햇볕의 방향과 그늘의 크기와 격자무늬 창살의 그림자도 동일한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 번도 햇볕을 인정해본 적 없는 불협한 나는 방구석에 잠복해 매일 해가 넘어가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름의 리듬에 동조하지 못했던 나는 이 여름의 복판이 한없이 궁금했다. 혼잣말도 리듬을 타고 돌아왔다. 내가 뱉은 말은 어디론가 흘러갔다가 리듬을 얻어 돌아오곤 했다. 나는 그 시절 내내 리듬에 시달리고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411 허연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 29p
얼띤感想文
건기乾期 하늘 건乾에 기약하다 만나다 할 때 그 기期다. 기의 어감은 약속은 아닌데 무슨 약속처럼 만남으로 닿는다. 물론 건기는 건조기로 기후가 마른 시기를 뜻하지만, 시에서는 모든 개념이 시 주체와 시 객체 사이에 오가는 리듬에 따라 동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시에서는 무엇보다 리듬이 가장 중요하다. 리듬만 생각하면 영 헤어나오기 쉽지가 않다. 동일한 리듬을 갖고 리듬으로 움직이고 리듬에 동조하지 못한 리듬을 타고 심지어 리듬을 얻어 돌아오곤 한다. 그 시절 내내 리듬에 시달리기도 했다. 참 안타깝다. 가끔 오는 바람 그렇다. 그 많은 시인 중 유독, 이 시집에 눈에 가고 이 시집 중 우연히 하나 선택된 건기, 까마귀와 까마귀가 둥지를 튼 웃자란 나무로 동일한 리듬을 갖고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상대도 까마귀로 비유해 놓고 이를 읽는 독자도 까마귀로 대치해 놓고 있는 셈이다. 리듬이란 시 인식의 과정을 통틀어 일컫는다. 그 시기가 건기인 셈이다. 햇볕의 방향, 즉, 시 객체 쪽으로 바라본다. 그늘의 크기와 격자무늬 창살의 그림자 한 글자씩, 마치 3차원 공간에다 띄워놓고 본다면 하는 생각, 그러나 시적 주체는 햇볕을 인정해 주지 않고 있다. 이 말은 시 객체가 몰라본다는 말이다. 약간의 시인상이 보이기도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방구석에 온종일 박혀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어쩌면 글 하는 사람은 독방 수감생활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여름의 리듬에 동조하지 못했던 나는 이 여름의 복판이 한없이 궁금하다. 이 시를 읽는 사람이 없으니까? 잘못 쓴 건가 하며 의심도 해보겠지, 그러니까 혼잣말도 리듬을 타고 돌아오고 내가 뱉은 말은 어디론가 흘러갔다가 리듬을 얻어 돌아오곤 한다. 리듬, 시 객체의 반항적인 모색 어떤 궁리 같은 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나는 그 시절 내내 리듬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혹여 긴 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리듬이 끝나는 시점에서 생전 듣지도 못한 어떤 리듬을 타다가 하얗게 똥을 지르며 격자무늬 창살 밖으로 나는 까마귀를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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