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 =안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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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
=안희연
그것은 사람처럼 걷고 있었다 마음이 어두울 땐 환해지고 환할 땐 희미해졌다 당신은 오래 알던 친구 같군요 무심히 말을 걸어본 적 있지만 대답을 들어본 적은 없다 의자를 내어주어도 앉지 않는다 그것은 오인될 때가 많다 비가 오지 않을 때조차 비를 맞고 있다 독성이 있는 사과일 거라고 심장을 옭아매는 밧줄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것은 다만 기다리고 있다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는 풍경을 골똘히 바라볼 뿐이다 수많은 이유로 아침을 사랑하고 그보다 더 사소한 이유로 여름을 증오하는 것처럼 숲이 거기 있다는 이유로 숲을 불태우러 오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것은 조용히 타오른다 까맣게 탄 몸으로 그것은 걷는다 빗방울의 언어가 얼룩으로만 쓰여지듯 흰 종이가 흰 종이인 채로 남아 있더라도 말해진 것이 있다고 발도 없이 문턱을 넘는다 귀바퀴에 고이는 이름이 된다 익숙한 침묵이 낯선 침묵이 되어 걸어나오는 동안
문학동네시인선 214 안희연 시집 당근밭 걷기
얼띤感想文
단어 하나에도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떠오르는 풍경에 어떤 운문을 씌우면 공처럼 날아갈 수 있을까? 그 끝을 붙들고 끝을 헤매다가 내 얼굴을 만지면 어느 방에 내려앉은 고양이처럼 고요한 침묵을 깨고 거닐어 본 갈망, 아! 따뜻한 햇볕이구나 다시 창밖을 본다. 시인은 갈망을 의인화해서 글을 쓰고 있다. 그것은 사람처럼 걷고 있으며 어두울 땐 환하다가도 환할 땐 도로 희미하다. 정말 가장 절망적일 때 새로운 길을 찾게 되듯이 어쩌면 흐리멍덩한 세계에서는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위치에 우리는 서 있다. 비가 오지 않을 때조차 비를 맞듯이 독성으로 이루어진 모든 잘잘못과 그것으로 인해 나의 심장을 옭아맸던 일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노심초사 애태우며 보아왔을까? 그것이 숲이 되도록 하나씩 심어져 내려갔던 하루 그리고 세월, 그것을 안타까워하며 심지어 태우거나 지우기 위해 달려든 우리의 이웃들까지 심한 고초로 닿았을지도 모른다. 혹여 칼이 될 수도 있는 침묵, 그 침묵을 뽑아버리고 이제 새로운 세상에 나오기를 갈망해 본다.
여기서 한 번 생각을 가져볼 시어가 있다. 독성이다. 언뜻 읽기에는 독성毒性으로 독이 있는 성분이거나 독한 성질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으나 독성瀆聖은 신성 모독도 있으며 독성獨醒으로 홀로 깨는 일을 뜻하기도 한다. 이 시에서는 오히려 毒性보다는 獨醒에 더 가깝지 않을까 물론 이러나저러나 맞는 말이지만 시는 늘 딴 곳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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