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들 =이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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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들
=이승희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이미 블랙홀 속으로 몸을 흘려보냈고 어떤 날은 당신을 뭉쳐서 길고 긴 의자를 만들었는데 어째서 외롭다고 하는가 어째서 내가 보인다고 하는가 사이라는 건 길을 잃으라고 있는 것 경계에 부딪쳐 울다가 잠들라는 것 비로소 망자가 될 수 있는데 비로소 지나칠 수 있는데 굳이 만지려고 하는가 굳이 믿으려고 자꾸 이해하려고 하는가 바깥을 향해서 손 흔들지 마 우린 이미 바깥이야 그리고 이 바깥에 안이란 없어 서로에게 스밀 어떤 자리도 없도록 해야지 그걸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그럴지도 몰라 용서할 수 있으니까 맨살을 만지고 입술에 입술을 대고 건조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그래서 끝내 닿지 않으려 한다면 그렇다면 말이야 우린 서로의 망명지가 될 수 있을 지도 몰라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독립시켜야지 당신은 당신을 만지고 나는 나를 만지고 애초 없는 것을 향해 달려간다면 그렇다면 말이야 우린 그렇게 마주보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 밤이 온다 보이지 않는 몸이 꽉 차서 우리는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
문학동네시인선 217 이승희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041p
얼띤感想文
시의 무한한 영역을 보고 있다. 블랙홀 속에 떠다니는 혼령들 그리고 떠다니는 그 무엇과 소리치고 있는 것들 문이 깨지라고 외치는 저 까마귀와 까마귀 떼들 문은 도통 깨지지 않고 벌겋게 달아오른 종소리만 있고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바깥은 새로운 망명지를 본 듯 좋아라 웃고 있으니 밤은 야 몸이 꽉 차기도 하겠다. 혼령이 바깥에 있으면 라면을 끓이다가도 냄비를 홀라당 다 태워버린다. 야야 무슨 타는 냄새가 나는데 어! 옆집에 또 고기 굽는가 보지 하다가도 후다닥 혼령 하나가 안에 잠시 기거하는 꼴이다. 그러니 망명지는 망명지였고 망자는 망자였으므로 망명지는 긴 의자를 하나 만든 셈이었고 당신을 뭉쳐 뭉치다가 그 구체로 인한 한 대 오지기 두들겨 맞은 시퍼런 눈두덩이만 있을 뿐이다. 그래 맞아, 맞는다며 소리 지르는 저 바깥. 사이, 틈, 새, 그 사이, 틈, 새를 보았다면 빠져나갈 궁리도 있었을 것이다. 그 경계에서 울다가 나는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나는 망명자들의 망명지로만 남을 것이므로 오늘 밤은 가득한 것만으로도 족하다. 시는 늘 도전이다. 애초 없는 것을 향해 달려간다. 이 말에 엄지 하나 꾹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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