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을 파는 상점 =이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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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6회 작성일 24-09-05 21:06본문
정원을 파는 상점
=이승희
우린 서로를 모른다 모른다고 종일 속삭인다 속삭이면서 발을 내어놓는다 발을 내어놓으며 맨발이라고 했다 참 따뜻한 발을 가졌으니 예쁜 모자가 어울릴 거야 그런 세계를 보게 되면 초대할게 모르는 세계는 그런 거니까 어긋나는 게 생활이야 어긋날 수 있다니 어긋나기 위해 사는 거라니 넌 정말 위대한 건축가가 되고 싶구나 자꾸 죽는 것과 자꾸 사는 것이 서로 좋아해서 물고기떼처럼 흘러가는 세계 그런 세계는 잘 모르지만 몇 번 죽으면 갈 수 있을까 나를 아주 가끔만 안아주는 사람이 있었어 안으면서도 몰랐고 몰랐으면서도 안았고 흩어지는 온도를 기록해보고 싶었는데 모르는 것이 생겨날수록 더 아름다워져야 했어 그래야만 했어 그냥 우리는 모르는 일에만 열중하자 모르는 것들 사이로 모르는 것들 조금씩 박아넣으며 모르는 것들을 낳을 때까지
문학동네시인선 217 이승희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하게 066-067p
얼띤 드립 한 잔
우리는 피안을 잘 모른다. 아니 잘 모르는 곳이 아니라 아예 모르는 곳이다. 죽어보지를 않았으니까, 죽음만큼 단호한 것도 없다. 딱 끊고 나면 발들일 기회는 전혀 없었으니까, 시제 ‘정원을 파는 상점’이라 하니, 마치 정원에 들어와 여러 쇼핑한 거처럼 선인장이 있거나 화분이 있고 모종 삽이라든가 거름과 꽃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시 내용은 전혀 딴판이다. 정원은 정원庭園이 아니라 정원正源에 더 가깝다. 항시, 우리는 모르는 사람을 대하며 대화하듯 속삭인다. 그것은 소리족이 아닌 묵언족에 더 가깝고 서로의 발을 내놓으며 서로의 발을 닦는다. 여기서 발은 족足이 아니라 발發이다. 모자 또한 모자帽子가 아니라 모자母字가 맞고 초대한 적도 없지만, 초대되어버린 당신을 대하다 보면 피곤은 한 층 더 쌓인다. 그 피곤이 받는 쪽은 물론 시 객체다. 건축가로 물고기 떼 몰며 노는 일, 그러다가 온도가 맞으면 회 치거나 무딘 우도라도 기꺼이 들고 목 댕강댕강 쳐 피 보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정 모르는 일들이며 그러한 것이 어떤 시기에 벌어졌거나 언제 또 죽었거나 언제 또 살아 움직였는지조차 모르는 까마득한 지구의 일이므로 거저 역사에 맡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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