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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마음 =박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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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5회 작성일 24-10-02 21:04

본문

하늘의 마음

=박판식

 

 

    커피를 코트에 쏟아서 세탁비를 물어주어 얼마나 다행인가

    저녁이 와서, 원하는 것을 얻어오지 못해서

    또 얼마나 다행인가

 

    길가의 갈대를 꺾지 않아서, 부모를 내가 고르지 않아서

    아들이 내 말을 안 들어서 또 얼마나 다행인가

 

    시장 고무 대야의 자라를 사서 풀어주지 않아서

    사격에 소질이 없어서

    사람을 죽이지 않아서

    금값이 비쌀 때 금니를 해 넣어서 또 얼마나 다행인가

 

    벚꽃놀이를 못해서

    죽을 만큼 아팠다가 나았다가 다시 아파서

    직장을 잃어서, 신년운세를 보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또 용서받을 잘못이 있어서, 살고 싶은 마음도 생겨서

 

 

   문학동네시인선 170 박판식 시집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 099p

 

 

   얼띤 드립 한 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 어쩌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복권이 당첨되지 않아서, 그림을 그릴 줄 몰라서 주식 매매를 잘할 줄 몰라서 포도 농사를 짓지 못해서 가본 나라가 없어서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어쩌면 해보거나 가져볼 수도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그러나 영원히 갖지 못하고 살다가 갈 수 있을 일이 어쩌면 확률적으로 더 높다. 그러나 그것대로 만족하는 삶이야말로 하늘의 마음이다. 구태여 억지로 무엇을 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영 포기하며 사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여기에 삶의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이 없다면 하루하루 사는 게 무의미하다. 커피를 코트에 쏟아 세탁비를 물어주어 얼마나 다행인가. 다음에는 좀 더 주의하면 되는 것이다. 저녁이 와서, 원하는 것을 얻어오지 못해 또 얼마나 다행인가. 다음에는 완벽한 저녁을 위해 좀 더 노력을 기울이면 되는 일이다. 부모를 내가 고르다면, 아들이 말을 잘 듣는다면 삶은 무미건조하겠다. 그러고 보면 하늘의 마음은 빈 백지다. 내가 무엇을 채우든 빈 종이 한 장만큼이나 되는 내 인생에 스스로 담아나가는 일 신께서 그 종이를 뜯는 날, 나는 하늘로 오를 것이다. 나는 여태 무엇을 담았을까? 눈에 띄는 업적도 없고 그렇다고 이웃과 잘 지낸 것도 없었다. 거저 고만고만한 삶에 돈 걱정 99% 그렇다고 그 해결이 잘 되었으면 모른다.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할 듯한 책임감으로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벚꽃놀이 하면서 블루 마운틴 한 잔 때리는 일 저기 저, 지는 붉은 노을 바라보며 눈을 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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