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얼음 방이다 벽도 천장도 얼음으로 덮여 있다 얼음 침상에 아내가 누워 자고 있다 물고기 비늘무늬 얼음 이불 속에서 아내는 냉동 새우처럼 쪼그린 채 언 꿈을 꾸고 있다 침상 밑에서 딸아이가 못으로 얼음 방바닥에 기린을 그리고 있다 드래건을 그리고 있다 숲을 그리고 있다 큰 녀석은 성에로 뒤덮인 창가에 서서 폭염의 거리를 내다보고 있다 녹아내리는 아스팔트 녹아내리는 사람들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는 아내 곁에 누워 있다 외짝 나무젓가락처럼 누워 있다 냉동 미라처럼 누워 눈만 말똥거리고 있다 그때 가늘고 예리하게 울린다 아내의 언 꿈이 부서지는 소리 딸아이가 그린 숲과 기린과 드래건이 조각조각 깨지는 소리 나는 얼른 일어나 아내를 흔들어 깨우려고 벌떡 일어나 딸아이를 껴안으려고 힘껏 목을 돌린다 목은 1mm도 돌아가지 않고 목에서 등줄기를 따라 울린다, 내 몸이 대륙처럼 갈라지는 소리 다시 힘껏 발을 움직인다 발도 1mm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나는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더 깊이 내쉰다 간신히 입김을 내쉰다 간절한 입김으로 언 입술부터 녹인다 얼음의 방에서 얼음 아이 얼음 열대야를 1mm씩 1mm씩 1mm씩
문학동네시인선 168 함기석 시집 음시 088-089p
얼띤 드립 한 잔
내가 좋든 싫든 꿈처럼 세상에 나와 있다. 한 사람의 영화배우처럼 실제의 드라마틱한 삶을 사는 배우이자 감독이다. 이를 총괄하며 다루는 신께 우리는 좋든 싫든 하루의 삶을 제출하는 1mm 보고서, 무엇을 쓸 것인가?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재봉질한, 한 뭉텅이의 시간과 공간을 얼마나 놀라운 것들로 채웠는지 아니면 얼마나 꽁꽁 언 발가락으로 어두운 숲을 지나려고 했는지 내가 탄 백마는 굳어 있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세상은 얼어 있었다. 살아있는 존재는 나밖에 없었고 이에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투쟁은 조소하는 웃음을 지우는 일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눈을 떠보면 늘 얼음 방이며 아내는 냉동 새우처럼 쪼그린 채 언 꿈을 꾸고 있으며 얼음 방바닥에 무언가를 그리는 딸아이만 있을 뿐이다. 창가에 서서 먼지로 뒤덮인 바깥을 내다보며 폭염의 거리를 비추고 또 비추며 눈대중해 본다. 오늘은 반듯이 건너갈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나무젓가락처럼 굳은 몸을 일으키기에는 여전히 비는 내리고 바람만 세차게 불었다. 뒤에서 누가 시퍼런 칼날로 내 목을 친다면 움직일 수 있을까? 그것이 죽음이었든 새로운 혁명적 아침이었든 맞을 수 있다면 1mm의 꿈은 실현될 수 있을까? 등줄기 따라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축축한 새벽을 다시 열어 본다. 1mm 꿈을 1mm 실현을 1mm 쟁취를 위해 오늘도 난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