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문장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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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90회 작성일 24-10-30 21:13본문
비와 문장
=김경수
비가 내린다.
꼬리에 강한 바람을 매단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풍경 속으로 파란 비가 뛰어내린다.
내리는 빗속으로 비가 내린다는 문장이 뛰어간다.
그러니까 거울 속에도 비가 내린다.
안녕이라는 인사말에도 비가 묻어 있다.
내 가슴속 깊이 흐르는 비에 대해
파란 눈의 프랑스인은 인상적인 행진行進이라고 했다.
하나의 따뜻한 문장文章이 흰 눈처럼 흰 눈썹을 위로한다.
산속에서 지르는 큰 소리에도 자상한 비는 묻어 있다.
흐르는 바람이여,
흐르는 비여,
흐르는 마음이여,
가끔 흘러온 인생을 돌이켜 보면
폭우가 내렸고 악천후惡天候가 드나들었고
체념과 인내가 문장의 등에 검게 새겨져 있다.
비가 내리지 않아도
모든 집들이 무너진 폐허에서
차갑고 슬픈 마음이 절뚝이며 걸어 나온다.
시작시인선 0502 김경수 시집 이야기와 놀다 43p
얼띤 드립 한 잔
야 준아 요즘 뭐가 핫하냐? 없죠 뭐, 뭘 하든지 망합니다. 청도 모 카페 기계 고장이 나, 부품 가지러 왔던 준이에게 하도 답답해서 시국을 물어보았다. 그의 말은 제2의 IMF가 곧 닥칠 거라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주식시장을 예의주시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쯤 폭락할까! 폭락할 때쯤 기회를 보겠다는 뜻이다. 그는 그가 낳은 자식도 없어 오로지 아내와 맞벌이하며 산다. 아내는 애견카페 미용을 하고 있다. 이 미용 사업도 예전보다 손님이 절반이나 줄었다. 한 집 건너 미용사 하겠다고 차린 집이 그간 는 셈이다. 둘이 벌어 먹고사는 것도 힘들다고 했다. 어제는 모 카페에 기계 수리 다녀온 얘기를 들었다. 그 집 점장은 카페를 팔아 얼마 전에 딸을 치웠다고 했다. 뭐라도 팔아 자식들 내보내는 것도 능력이라며 나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이럴 땐 자식 없는 준이가 하염없이 부럽기만 하다. 앞선 세대 사는 모습을 여실히 보는 와중에 결혼 안 한다고 해도 결혼 시즌이면 어느 집 누가 또 간다며 청첩장이 날아오고 축의금 붙이는 일에 바쁘기만 하다. 그런 거 보면 내게 주어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주머니는 영 가난을 벗지 못하니 애간장만 탄다. 그렇다고 영업이 더 좋아질 리는 아무리 보아도 찾기 힘들고 빚 갚는 일은 도무지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소비가 있어야 투자를 하고 일을 하지만 세상은 너무 조용해졌다. 그래도 되는 집은 된다고 하는 말, 그 되는 집도 찾기 힘든 세상이 돼 버렸다.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수적천석水滴穿石 정말일까! 비다. 비뿐이다. 늘 비가 내린다. 오십, 이후는 늘 비가 내린다. 꼬리에 강한 바람을 매단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풍경 속으로 파란 비가 뛰어내린다. 그 비를 맞으며 집 앞에 서서 무너진 폐허를 바라보고 있다. 차갑고 슬픈 마음이 온종일 절뚝이며 걸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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