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선 =김상미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난파선
=김상미
그와 내가 닮은 점은
부서지고 가라앉으면서도
서로를 열렬히 원한다는 점이다
사랑을 가지고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할 때
나약한 인간들은 자신을 거세하고
사랑의 통증이 헌신적으로 심신을 좀먹는 걸
그냥 두고 즐기지만
세상엔 아무리 더럽히려 해도
더럽혀지지 않는 게 있다
그것은 많은 배들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으면서도
바다를 결코 원망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와 내가 닮은 점도 그런 것이다
끝없이 가라앉고 부서지면서도
서로를 열렬히 원한다는 것
문학동네시인선 183 김상미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071p
얼띤 드립 한 잔
아직은 살아 있으니까, 어렴풋이 그려보는 그녀를 벌써 헤어지자고 하면 그녀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겠지. 그녀의 미래에 관한 결정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지 않는가! 아니 아예 모른다고 해두는 게 낫겠지. 그렇다고 바로 이사한다고 집주인에게 알릴 필요까지는 없었어. 다음은 눈빛이야, 어디에 안착할지 분명히 빠져나간 것 같은데 오히려 더 무거운 느낌을 받고 있을 때 나는 전원생활을 그리며 누워 있기만 했어. 반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여전히 시골길 거닐며 바라본 버드나무 가지 하나, 뚝 꺾어 습작하듯 땅바닥에 앉아 흙을 나르는 개미만 애꿎게 죽였으니까.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 아무것도 쓸모없는 비관주의자, 오로지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저 내리는 비만 바라보았을 뿐이지. 해방이라고 웃기지 마! 네가 어디를 가든 갇혀 있는 곳은 단 이곳 지구뿐이라는 것도 잘 알잖아, 더는 요구하지 말고 그렇다고 물러서지는 마라, 기강이 해이한 건 너야 하루살이 아니 순간 틈이 생겨 눈앞에서 사라질 수만 있다면 가슴을 풀고 술 한 잔 따랐을 거야. 게다가 감당할 수 없이 들쑥날쑥한 치마와 저고리에 국방색이라니 그래 마지막 노력은 있어야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게 미로에 빠져 조용하고 사려 깊은 소년으로 있고 싶지는 않으니까. 문 열면 ‘나 왔어.’ 하고 소리 지르면 예에 하고 대답하지 말고 눈 헬 가이 부릅뜨고 그냥 소리 질러 얼마 전에 함께 한 수미도 그랬잖아. 예이 미친년 지랄 염병한다고. 바다를 몇 점 집었다고 혀가 녹겠느냐는 말이지. 어울려 씹다 보면 모두 다 거기서 그야 사랑 웃기지 마! 끝없이 부딪치고 끝없이 세우는 일밖엔 없어 서로 열렬히 원한다는 것 다 망령일 뿐이라고 이만 줄이자 나 자야겠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