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문양 =윤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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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4회 작성일 24-11-05 22:56본문
비의 문양
=윤의섭
빗방울이 떨어질 때까지의 경로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최단거리를 달려왔을지라도 평생을 산 것이다
일설에는 바람의 길을 따라왔을 거라고 한다
해류를 타고 흐르는 산란인 듯
어디에 안착한다 정해졌더라도 생식할 가망 없는 무정란인 듯
구름의 영역 너머로 들어선 빗방울은 추락하지 않는 달을 본다
스스로의 길을 따라 휘도는 성운을 본다
귓전을 가르는 바람소리 속에서도 궁륭 가득 흐르는 신율新律을 들으며
빗방울이 어떻게 미쳐 갔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살점을 떼어 내며 살생의 속도로 치달리는 운명이란
길을 잃고 천공 한가운데서 산화하거나
영문도 모른 채 유리창에 머리를 짓찧고 흘러내리거나
하늘길 지나오면서는 같은 구름의 종족과 몸을 섞기도 했다
나란히 떠나왔던 친구는 어느 나무 밑동에 뿌려져 이미 잠들었다
발을 디디고서야 빗방울은 최초로 신음한다
이 기나긴 침묵으로 흐린 하늘 가득하다
구름으로부터 그어진 무수한 여정으로 흐린 하늘 슬프다
오직 고요의 춤만이 허락된 비행으로 흐린 하늘 눈부시다
지상을 적시며 빗방울은 비로소 몸을 묻는다
친구를 가로질러 온 경로다
민음의 시 209 윤의섭 시집 묵시록 40-41p
얼띤 드립 한 잔
시제 ‘비의 문양’은 물건의 거죽에 나타난 무늬나 형상 혹은 모양 같은 것으로 비라고 했으니 견줄만한 혹은 그릇된 자로 제유한 것이겠다. 빗방울은 물의 최소단위다. 빗방울은 구체형식을 띠고 있으며 어디든 폭폭 젖는 흡수력까지 지녔다. 그 빗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경로는 알 수 없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뭐 때문에 읽고 있는지 다만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기 위한 절차였다면 빗방울은 시의 목적성까지 지녔다. 그 순간 한평생의 보람으로 한 인생을 바라보았으니까! 일설에는 바람의 길을 따라왔을 거라고 했다. 삶은 강한 생명력을 지님으로 지금은 깜깜한 암흑일지언정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는다. 해류를 타고 흐르는 산란이다. 해류海流, 바닷물의 흐름 그것은 무엇을 잉태한 것으로 어류의 이동을 분석하고 정착하기까지 과정을 묘사한다. 어디에 안착한다 정해졌더라도 생식할 가망 없는 무정란인 듯 구름의 영역 너머로 들어선 빗방울은 추락하지 않는 달을 본다. 한마디로 머리에 낀 것은 많으나 한 줄 쓸 수는 없는 상태다. 스스로의 길을 따라 휘도는 성운을 본다. 혼자만의 상상으로 입맞춤이다. 귓전을 가르는 바람 소리 속에서도 궁륭 가득 흐르는 신율新律을 들으며 빗방울이 어떻게 미쳐 갔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궁륭穹窿은 활이나 무지개같이 한가운데가 높고 길게 굽은 형상을 말한다. 그러니까 빵처럼 부푼 마음을 상징한다. 신율新律은 없던 것이 새로 생긴 체계와 같다. 변이된 어떤 시적 작용을 읽고 있는 셈이다. 살점을 떼어 내며 살생의 속도로 치달리는 운명이란 길을 잃고 천공 한가운데서 산화하거나 영문도 모른 채 유리창에 머리를 짓찧고 흘러내리거나 하늘길 지나오면서는 같은 구름의 종족과 몸을 섞기도 했다. 문장이 제법 길다. 변이된 시적 작용의 쓰임새에 관해 서술한 장면이다. 첫째는 산화되었거나 그러니까 어떤 원자를 만나 원자를 잃는 현상이다. 이런 것은 아무것도 없이 맹하다. 둘째는 유리창에 머리를 짓찧고 흘러내리는 현상이다. 이는 꿰뚫고 피를 본 것이 된다. 여기서 피는 피 혈血이 아니라 거죽 피皮다. 피를 보기는 했지만, 시에 범접하지 못한 어떤 시적 현상임을 알 수 있다. 셋째는 하늘길 지나오면서는 같은 구름의 종족과 몸을 섞는다. 뒤죽박죽인데 뭔가 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모양은 머리를 땋았지만, 인디언처럼 어수선하기만 하다. 정장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나란히 떠나왔던 친구는 어느 나무 밑동에 뿌려져 이미 잠들었다. 원자 몇은 잃은 상황 그러니까 시적 변이를 논한다. 밑동 적啇은 뿌리나 물방울 또는 누그러짐을 뜻하는데 설 립立에 막힐 막을 경冂에 옛 고古로 이룬 자로 잘 쓰지 않는 한자다. 나무 목木자를 보듯이 줄기보다 뿌리를 더 강조하는 상형문자다. 뿌리는 근본이며 헌신이며 생명 유지에 필수다. 줄기보다 오래된 것이라 옛 고古로 표현한 문자 밑동 적啇이다. 발을 디디고서야 빗방울은 최초로 신음한다. 발發하다. 조발석지朝發夕至다. 아침에 떠나 저녁에 이른다. 물론 아침은 그 아침이 아니며 저녁은 그 저녁이 아니다. 푸우욱 적심과 이후 죽음이다. 이 기나긴 침묵으로 흐린 하늘 가득하다. 죽음을 맞았으니까! 구름으로부터 그어진 무수한 여정으로 흐린 하늘 슬프다. 죽음을 맞는 일은 다시 캄캄한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슬픈 일이다. 오직 고요의 춤만이 허락된 비행으로 흐린 하늘 눈부시다. 일종의 자화자찬自畵自讚으로 들린다. 눈부시기까지 할까! 거저 반성만 있을 뿐이며 거기서 좀 더 깨달음을 얻었다면 성찰만 있을 뿐이다. 지상을 적시며 빗방울은 비로소 몸을 묻는다. 지상은 地上이 아니라 紙上이다. 친구를 가로질러 온 경로다. 한 친구를 묻고 따라서 가니 동변상련同病相憐이자 이심전심以心傳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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