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언기 =김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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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1회 작성일 24-11-16 21:26본문
종언기
=김 안
불가능해진다. 창을 닦으며 생각한다. 지난번 진료 때보다 선생은 더 늙고 야위어 있었다. 햇빛을 자주 쬐는 것이 좋다던 그의 등 뒤로 암막 커튼이 살짝 벌어져 있다. 날카로운 빛이 선생의 정수리를 가르고 있다. 여기 검게 보이는 부분 보이시죠. 불가능해 보인다. 말랑한 검은 반죽들 사이로 빛⎯어제 병원에 가던 길에 우연히 만난 동창은 자본주의의 돼지가 되어 있었다. 벌어진 셔츠, 그렇게 하얀 배는 본 적 없었지. 누가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나. 나는 창을 닦는다. 닦을수록 어두워지는 빛.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창 앞에 있다. 아주 깨끗해 보이죠.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말이죠. 우주보다 아주 조금 모자란 저것을 선생은 가리키며 말한다. 육안일 뿐입니다. 병은 보이는 것 너머에 있어요. 조심하세요. 선생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는 귀신이 나를 내려다본다. 텅 빈 두 눈 사이를 가르는 빛의 파장. 큰곰자리처럼 보이네요.
*
나는 누워 창밖을 본다. 하얗게 성에 끼는 소리. 지난 겨울 백운호에서 들고 온 돌멩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 누군가 오는 건가. 몸을 일으켜 창을 닦으며 생각한다. 불가능하다. 살과 뼈 사이가 벌어지는 소리. 그 틈, 그 우주적 질감. 늙은 새 한 마리가 밤하늘에서 가파르게 떨어진다. 떨림과 빛⎯사람의 소리를 지른다. 창을 열고 호흡한다. 날개를 편다.
문학과지성 시인선597 김 안 시집 Mazeppa 44-45p
얼띤 드립 한 잔
얼마 전 병원에 다녀온 적 있다. 아마 병원을 찾은 것도 십 년 만에 일이지 싶다. 아니 더 된다. 삼십 대 후반쯤에 대장내시경을 해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소싯적 땅바닥에 떨어진 것도 가리지 않고 먹곤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후부터일까! 특히 장이 좋지가 않았다. 결국, 결혼한 후 서른 초쯤에 만성 충수염으로 수술을 받았다. 커피 일을 삼십 년 가까이 한 것도 문제면 문제다. 늘 입에 커피를 달고 살았다. 무엇을 먹든 화장실은 금시였고 하루에도 서너 번은 그 문을 당겨야 했다. 속이 너무 이상해서 병원에 간 것이었는데 이상한 기분까지 들기도 해서 병에 관한 여러 정보를 알아보기도 했다. 에휴, 이참에 대장암이라도 걸렸으면, 대장암 진단만 받으면 1억 2천은 거뜬히 챙길 수가 있어. 그러면 빚도 갚고 나름 여유는 좀 생기겠지 하며 혼자 너스레를 떨면서 병원에 간 것이다. 또 사실, 대장암 초기현상과 췌장암 초기증상까지 아주 완벽히 들어맞았다. 살도 몇 킬로나 빠져 제법 가벼운 것도 나를 위안하기까지 했다. 검사를 받기 전에 병원 지시대로 따랐다. 국민건강검진도 받지 않아, 그 서류처리도 하고 여기에 보태어 CT와 각종 내시경까지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의사 선생은 나이에 비해 아주 건강함을 강조했고 여기에 운동만 좀 하시면 완벽하다는 것이다. 하늘에 번쩍, 무언가 서운한 것이 지나간 것이다. 삶에 더 충실하라, 말인 거처럼 들렸다. 이후 거짓말처럼 장도 좋아졌다. 화장실 몇 번씩 드나드는 일도 준 것이었고 굵고 실함이 소아의 변이었다.
시, 종언기는 없어지거나 사라진 후의 기록, 계속하던 일 끝장 난 것을 말한다. 어쩌면 시인은 죽음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나이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을 만난 본 일은 없으나 어떤 동질감마저 느껴온다. 글이란 참 묘하다. 가끔은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거처럼 읽히기도 해서, 아직도 닦을 창을 생각하면 곰처럼 바위에 앉아 새 모자 새 고무신을 신고 저 굵고 실한 대를 꺾는 일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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