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의 흰색 =송재학
페이지 정보
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92회 작성일 24-11-30 21:10본문
불가능의 흰색
=송재학
흰색의 눈에 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수컷 곰이 배고픔 때문에 새끼를 잡아먹는 북쪽에는 남몰래 우는 낮과 밤이 있다 흰색의 목마름이 색깔을 지운다면 지평선은 얼음을 지운다 허기진 북극곰이 흰색을 삼키거나 애먼 흰색이 북극곰을 덮친다 얼룩진 흰색과 검은 흰색이 아롱지듯 겹치고 있다 솟구치는 선혈과 찢어지는 피륙마저 희고 붉기에 금방 얼어버리면서 흰색이 아니었지만 흰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흰색이 되고 만다 가까스로 흰색 너머 낮달의 눈가가 짓무른다면 유빙을 떠도는 드라이아이스는 유령이라는 단막극을 되풀이한다 용서를 구하는 북극황새풀이 흰색 앞에 엎드린다 사랑한 것들로부터 상처받는 흰색이다 흰색의 손과 내부가 서로 등 돌리고 있다 하루 종일 환하거나 어두운 여기 흰색이라는 귀 없는 해안선이 자란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25 송재학 시집 슬프다 풀 끗혜 이슬 27p
얼띤 드립 한 잔
불가능의 흰색은 신의 영역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 치 앞을 모르니까, 미지의 영역을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벼락부자가 될 것이고 돈 걱정 삶에 대한 걱정은 일절 하지 않아도 되겠다. 어쩌면 시를 읽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앞을 보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함일 것이다. 흰색의 눈에 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분명 현실에 관한 부정적인 사례 하나가 죽은 것이므로 슬프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세운 진리였기 때문이다. 수컷 곰이 배고픔 때문에 새끼를 잡아먹는 북쪽은 남몰래 우는 낮과 밤이 있다. 북쪽은 시적 객체가 머무는 방위를 표시한다. 수컷 곰은 배 가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자기가 낳은 것을 종일 지켜보는 일은 우는 행위에 해당하고 낮과 밤은 노력을 기울인 시간을 묘사한다. 흰색의 목마름이 색깔을 지운다면 지평선은 얼음을 지운다. 흰색의 목마름과 지평선은 대조를 이룬다. 한쪽은 신의 영역이라면 다른 한쪽은 삶이 내재한다. 허기진 북극곰이 흰색을 삼키거나 애먼 흰색이 북극곰을 덮친다. 흰색과 북극곰과의 관계를 묘사한 것으로 역시 대조적이다. 얼룩진 흰색과 검은 흰색이 아롱지듯 겹치고 있다. 얼룩은 그 의미를 상실한 것을 묘사하며 ‘검은’이라는 말은 신의 영역에 좀 더 가깝게 진행한 상황을 은유한다. 이러한 과정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발전한다. 솟구치는 선혈과 찢어지는 피륙마저 희고 붉기에 금방 얼어버리면서 흰색이 아니었지만, 흰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흰색이 되고 만다. 이물질일까 아니면 신의 영역에 합류한 것일까 사실, 그것은 신만이 알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 이르는 길은 처참이라고 해야 할까 선방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튼, 자의 행방을 기술한다. 가까스로 흰색 너머 낮달의 눈가가 짓무른다면 유빙을 떠도는 드라이아이스는 유령이라는 단막극을 되풀이한다. 유빙은 대표적인 흰색의 상징물로 쓰이고 드라이아이스는 흰색의 고체 물로 금시 증발하고 말 어떤 유기물에 불과하다. 단막극이라는 말도 재밌게 닿는다. 마치 짧게 사정하고 만 연극인 것처럼 말이다. 용서를 구하는 북극 황새 풀이 흰색 앞에 엎드린다. 동물적 심성과 검정에 이르지 못한 색깔과 바람에 나부낀 한 때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사랑한 것들로부터 상처받는 흰색이다. 흰색의 손과 내부가 서로 등 돌리고 있다. 겉과 속이 다르고 바깥과 내부가 다른 흰색의 영역, 종일 환하다가도 금시 어두워지기 일쑤 돌아갈 곳 없는 바다 근처에서 빙빙 떠도는 존재에 해안선은 늘 핏빛으로 물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