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거실의 것 =장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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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3회 작성일 24-12-04 21:08본문
사랑은 거실의 것
=장수진
그대는 좋은 땅에서 난 올리브유를
거실에 남겨두었네
신선하고 푸릇한 빛과 건강을
당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
거실엔 볕이 잔뜩 쏟아지고
단순하고 복잡한 사실들
늘 커다란 해가 뜨죠
아침마다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는 대신
해를 한 스푼씩 떠먹을 수 있다면
건강이나 좋은 죽음을 기약하지 않는
먹음
그런 끝은 예술영화에나 나오는 것이라면
물건으로 둘러싸인 거실을 운운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저 언덕이 흘러내려도
더 무서워도 나는 좋습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98 장수진 시집 순진한 삶 32-33p
얼띤 드립 한 잔
사랑은 거실의 것, 그러니까 사랑은 사실에 근거한 것에 둔 것이며 거기를 바탕으로 한다. 거실은 거처하는 방(居室)이라는 뜻과 큰 방(巨室)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거실(據實)은 사실에 근거한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대는 좋은 땅에서 난 올리브유를 거실에 남겨두었네. 여기서 좋은 땅과 구별되는 단어를 떠올리자면 척박瘠薄이거나 각박刻薄이겠다. 하나가 시적 객체를 상징한다면 다른 쪽은 암묵적으로 시적 주체를 의미한다. 땅이 파리하고 야박하거나 그것도 모자라 깎아내리는 현장 결국, 어둠으로 자처하겠지만 말이다. 올리브유는 ‘올+리브+유’라는 뜻으로 합성어다. 모두 버리고 떠난 당신쯤으로 보는 것이 맞겠다. 물론 콩글리시 영어지만 말이다. 시에서는 뭐든지 암호처럼 암호화에 범접하며 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니까 거실에 남겨둔 것은 신선하고 푸릇한 빛과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 알게 모르게 보고 있지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는 양에 차지 않는다. 당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 거실엔 볕이 잔뜩 쏟아지고 있다는 단순하고도 복잡한 마음을 모르고 있다. 그러니까 내 가슴을 함 열어둬 이 말이다. 하지만, 열어젖히지 못한 이 애탄 마음엔 늘 커다란 해만 뜬다. 아침마다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는 대신 해를 한 스푼씩 떠먹을 수 있다면 건강이나 좋은 죽음을 기약하지 않는 그런 ‘먹음’ 그야말로 사랑의 끝장 클라이맥스일 텐데. 아침은 아침我浸으로 나를 푹 적시는 일, 그러니까 시가 열리는 그 시각을 은유한 것이며 하품은 일품과 달리 시적 겸손에 해당한다. 기지개는 기지개起紙開로 종이나 지혜가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대신한다. ‘먹음’은 무위도식無爲徒食보다는 호의호식好衣好食을 지양한다. 예술영화藝術映畫는 흥행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물건으로 둘러싸인 거실을 운운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물건은 굵고 실한 지적 지혜에 지각을 은유한 것으로 하늘의 계시와도 같다. 저 언덕이 흘러내려도 더 무서워도 나는 좋습니다. 여기서 언덕은 고개가 아니라 말씀 언言에 행위나 어진 것을 뜻하는 덕德이다. 더 무서워도 나는 좋습니다. 고독을 자처하는 시인이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에 대한 열정을 우리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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