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께 =박라연
페이지 정보
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86회 작성일 24-12-06 21:36본문
두께
=박라연
라일락이 툭 목을 꺾는다 단명한 것보다 더
잔인한 일은 향기가 사라지는 일
향아! 늙는다는 것은 물이나 공기의 두께로
얇아지는 새벽이 오는 거
라일락의 입관식 날 관 뚜껑을 살짝 열고 난 괜찮아!
윙크해도 못 본 척하는 거
비애와 손잡으면 수다가 사라지는 거 이목구비를
데리러 올 물불, 에게도 공손해지는 거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유리창 닦은 적 없어서
소방차에 올라 불의 나라로 뛰어든 적
없어서 세끼 밥 벌려고 영영 못 돌아올
두께인 줄 뻔히 알면서 길 떠난 적 없어서
물불, 에게 거슬릴까 봐 조금 두려운 거
문학과지성 시인선 577 박라연 시집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32p
얼띤 드립 한 잔
시제 ‘두께’는 두꺼운 정도가 일반적인 의미다. 그러나 ‘~께’라는 말은 뭐 뭐 ‘에게’의 높임말이기도 해서 말 두斗나 머리 두頭로 어떤 한 사물을 제유한 느낌마저 든다. 사실 또 그렇게 쓴 시이기도 하다. 라일락이라는 시어도 참 좋다. 펼치거나 벗은 듯한 그 느낌에서 닿는 라(羅.裸)와 날과 춤을 은유한 듯한 일(日.佾)과 즐기는(樂) 일은 역시 시적 활동이다. 단명한 것보다 잔인한 일은 향기가 사라지는 일. 그 어떤 것도 시보다 짧은 삶은 없다. 이렇게 쓰면 어폐가 될 수 있으나 최소한 짧거나 그 수명은 같다. 한 개인이 닿는 시에 대한 감정은 금시 깨치는 일 진짜 괜찮다 싶어 죽을 때까지 가보처럼 내 걸은 한 줄 시 문장이 있을까 모르겠다만, 그때뿐이다. 향아! 늙는다는 것은 물이나 공기의 두께로 얇아지는 새벽이 오는 거. 향에 대해서는 전에도 한 번 쓴 적이 있어 그냥 넘어간다. 여기서 두께는 부풀어 오른 어떤 시초를 연상케 한다. 새벽에서 보면 하나의 일거리며 깎고 또 깎아 내려서 물불에 가깝게 정착하는 시도는 있어야겠다. 언뜻 호박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부를 호呼에 벗길 박剝으로 무당 아닌 굿으로 치켜세우는 일 엄지 척滌으로 말이다. 라일락의 입관식 날 관 뚜껑을 살짝 열고 난 괜찮아! 그러니까 시적 자아는 배경에서 사장된 거로 인식이 있어야 하지만, 모두 무관심이다. 그러므로 비애와 손을 잡거나 수다가 사라지게 되며 공손 아닌 공손을 이루고 허공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 자비를 베풀고 있다. 거기다가 소방차에 의지하며 불을 불러오는 행사까지 여기서 소방차는 소방차疎方車로 트일 소疎에 모 방方을 이룬다. 그 안은 구체를 뜻하는 차가 있겠다. 유리창은 대표적으로 마음을 상징하며 이목구비와 공손은 마음의 형태와 혈통을 은유한다. 이러한 모든 행위는 역시 밥에 있다. 생존이다. 향아 벼 화禾에 가로 왈曰로 이룬 글자 밥의 향기는 異域萬里까지 퍼진다. 이 모두 두께를 위한 것이며 그러나 조금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먹고는 살아야 하지만 너무 알려져 민망하다면 낯짝도 뜨겁기 때문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