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박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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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 241227)
Eve/박기준
습관처럼 눈 떠보니 눈 세상, 밤새 어린 손자의 숨소리처럼 내렸다
온몸에 지독한 먹구름이 팽창하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
이브는 떠났다 한 뼘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끈을 놓지 않는다
이브의 축제에 싸인 도시는 문을 닫아 갈비뼈를 빼앗긴 아담은
단어들 사이에서 퉁퉁 튕기는 시어를 뜯어먹고
어깨가 무너져 내리는 어둠과 함께 홀로 문을 연 선술집에 들러
바다를 품에 안은 매생이 굴국밥에 계란을 푼다
개나리꽃이 매생이 사이에 핀다 막걸리가 고요를 피운다
따뜻함에 취해 눈과 뒹구는 도로를 허정거린다
케이크를 든 시린 손들이 집으로 총총 걷고 아이의 미소를 그리며
인형을 선물로 든 엄마의 마음은 춥지 않다
기쁨을 숙성시킨 와인 판매소엔 슬픔이 발 디딜 틈이 없다
맨발로 산책 나온 강아지
눈 위에서 표정 없이 깡충거리고 주인만 흐뭇
통닭을 기다리는 어린 자식을 위해 라이더의 굉음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깨트리고 홀아비에게 따뜻한 음식을 배달한다
성당을 향하는 어둑한 골목길 안엔
연인의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키스의 온도가 수은등을 달군다
마에스트라의 손가락이 아기의 탄생을 찬양하는 사이
지구의 한쪽 귀퉁이에선 포화가 구유 속 아기 위로 불꽃을 터트린다
하늘의 별만큼 많아진 십자가는 무심하게
폐지 줍는 허리 굽은 노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이브날 속이 허해진 눈발이 흩날린다
(시감상)
한 해를 보내고 한 해를 맞는다. 푸른 용의 해가 온다. 연말로 갈수록 우울한 정국의 한가운데 백척간두에 섰다. Eve를 쓴 시인의 아픔이 느껴진다. 어딘가엔 성탄 미사가, 어딘가엔 성탄조차 입에 올리기 힘든 전쟁 상황.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죽고, 무수하게 많은 십자가 불빛은 누굴 구원하고자 밝힌 하늘의 촛불인가? 여전히 폐지 줍는 노인의 리어카는 움직이고 속이 허해진 하늘이 약간의 눈을 내린 듯 퀭하다. 삶은 조화다.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 어려운 사람과 배부른 사람, 모두 약간의 양보만 하면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시계와 같은 인생인데, 덜 먹고 덜 말하고 덜 욕심내지만 않으면 지금보다 더 행복할 것인데.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시감상을 독자 여러분에게 드리며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내년 이맘때쯤은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마냥 즐거운 Eve 가 되길 축원 드린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이 건강하길 간절하게 소망하며 한 해를 맺는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박기준 프로필)
국민일보 신춘문예/오륙도신문 신춘문예/직지콘텐츠 최우수상/ 한용운 문학상 최우수상/제4회 DMZ문학상/제16회 포항소재 문학상/ 2024 호미곶 흑구문학상 대상/제1회 디지털 문학상 수상(수필)/제44회 근로자문학제 수상(수필) /2024 선수필 신인 문학상 외 다수 수상
박기준 시인, 수필가
댓글목록
鵲巢님의 댓글

형님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던 거 같습니다.
세상이 점점 조용해지는 듯.....폐지 주워야 할
건강은 있어야 할 듯해서 오늘도 동네 한 바퀴
거닐었습니다. 올 한 해 만큼 고민 많은 해도
없을 듯하네요....건강하시고요....
늘 좋은 시 한 편과 형님 마음까지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金富會님의 댓글의 댓글

새해가 왔네...아우님...
새해 같지 않은 새해가 매섭게 왔네
그래도 희망을 갖고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 인지
살아보니 알겠네.
고맙고 건강하시게. 하는 일 잘 되길 더불어 건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