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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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이영광
아버지, 속 아프고 어지러운데 소주 마셨다. 마셔도 아프다 하면서 마셨다. 한해에 한 사흘, 마셔도 많이 아프면 소주병 문밖에 찔끔 내놓았다. 아버지 쏟고 싶은 건 다 쏟고 살았다. 망치고 싶지 않은 것 다 망치고 살았다. 그러다 하루 소주 한 됫병으로 천천히, 자진했다. 조용한 아버지가 좋다 죽은 아버지가 좋다. 아, 그러나 텅 빈 지구에 돌아온 달처럼 덩그러니 앉았노라니, 살았던 아버지가 좋다. 시끄럽게 부서지던 집이 좋다. 아버지 평생 농사 헛지었다. 문득 문득 겨울 들판처럼, 글자를 다 잊어버린 지구의 어머니가 있다. 공구 같은 손이 또 시집 그 거칠고 어지러운 것을, 고와라 고와라 쓰다듬는다. 점자를 읽듯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호두나무 가지에 찔려 오도 가도 못하는, 뚱그런 보름달 헛배.
창비시선 366 이영광 시집 나무는 간다 103p
얼띤 드립 한 잔
굳이 아버지를 해석한다면 뭐라고 쓸까? 시적 주체로서 나 아我에 버, 경상도 사투리로 ‘부어’라는 말과 지, 종이나 앎 혹은 손가락 또는 땅이나 물이 담겨 있는 못까지 얼마든지 많겠다. 소주는 물론 술이겠지만 그 술을 무엇으로 볼 것이냐가 문제겠다. 언덕 혹은 언술, 아니면 소통疏通에 물이 흐르듯 주注를 단 주사나 주유에 가깝겠다. 그러니까 마셔도 아프다 하면서 마시는 것이다. 이는 의무적인 행사다. 한해에 한 사흘이다. 여기서 해는 시적 객체며 사흘은 죽음의 허물이 이르기까지다. 소주병 문밖에 찔끔 내놓았다. 병은 잡을 병秉에 그 방향은 남녘(丙)에 앉은 자다. 쏟고 싶지 않아도 쏟은 건 어쩔 수 없고 망치고 싶지 않아도 다 망치며 산다. 망치忘置는 망각忘却으로 어떤 사실을 다 잊어버린 것을 말한다. 그래야 속이 편하다. 자진했다. 스스로 나아가거나(自進) 스스로 몰락(自盡)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용한 아버지가 좋고 죽은 아버지가 좋다. 그러면서도 텅 빈 지구에 돌아온 달처럼 덩그러니 앉았노라니, 살았던 아버지가 좋다. 시끄럽게 부서지던 집이 좋다. 그렇게 집은 부서져야 새로운 집이 생기고 분가를 이루니 이 어찌 안 좋을 수 있으랴! 그러면 지구의 어머니는 무엇일까? 시적 주체를 낳은 존재를 인식하게 한 시적 객체다. 그러므로 공구 같은 손이 되고 그 손은 거칠고 어지럽기만 하다. 다만 고와라 고와라 쓰다듬듯이 스쳐 지나간다. 고와라에서 고考는 상고 즉 밝히며 살피며 견주고 궁구하고 조사해 볼 만한 처사겠다. 와에서 기와가 지나가고 일으키거나 누운 것으로 라에서 펼치거나 벗거나다. 호두나무는 부르짖을 호號에서 머리 두頭에 아무것도 없는 나무를 상징하며 뚱그런 보름달 헛배. 뚜렷하게 둥근 보름달만치 가득한 것도 없으니 실은 개 이득 하나 없는 허상에 불과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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