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함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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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함기석
네가 떠난 밤, 바다는 글자 잃은 시집이다
등대는 기린 눈망울을 껌벅이며 애처로이 수평선을 바라보고
누가 맨발로 물 위를 위태롭게 걷는 소리
바람이 어린 삵처럼 방파제를 넘어와 민박집 방문을 긁어 댄다
홑이불 잠을 걷고 문을 열면
첫눈이다 점점이 너의 입술이다 희디흰 숨결들
죽어서 차고 흰 해풍이 된 물고기들, 공중에서 공중을 놀고
내 영혼은 지금,
천천히 해저로 가라앉는 무쇠 닻
사랑의 입말은 핏물이 다 빠져나간 짐승의 마른 혈관이다
해저처럼 외로운 잠
네 알몸처럼 내 살 곁에 누워 바스락거리는 어둠
새벽녘, 먼 지층으로부터 여진처럼 울려오는 찬 물소리
민음의 시 269 함기석 시집 54-55p
얼띤 드립 한 잔
첫눈에 대한 묘사다. 사랑은 눈빛에 있다. 네가 떠난 밤, 바다는 글자 잃은 시집이다. 바다만큼 공허한 것도 없다. 한없이 넓고 한없이 깊다. 茫茫大海다. 글자 잃은 시집이란 그 만큼 마음을 잃었단 표현이겠다. 글자로 가득해야 할 시집이 모두 어디다 내 버렸는지 송두리째 뽑아 간 것이다. 등대는 기린 눈망울을 껌벅이며 애처로이 수평선을 바라본다. 등대는 외눈박이로 한 곳만 주시한다. 기린은 목이 긴 동물로 동물적 심성을 기렸다면 기린은 일어날 기起에 비늘 린鱗으로 무언가 내뱉고 싶은 글자를 암묵적으로 내재한다. 수평선은 양쪽 균형을 묘사하지만, 실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므로 시가 탄생했겠다. 누가 맨발로 물 위를 위태롭게 걷는 소리, 이는 균형을 깨는 일이며 사건의 발단이 된다. 바람이 어린 삵처럼 방파제를 넘어와 민박집 방문을 긁어 댄다. 삵은 들고양이로 집에서 기른 고양이와는 별개임을 알 수 있다. 방파제는 어떤 한 경계를 뜻하는 것으로 원래 있어야 할 곳을 지키지 못하고 결국 한 선을 넘는다. 방문을 긁어 댔으니까. 홑이불 잠을 걷고 문을 열면 첫눈이었다. 처음 만난 그 느낌, 입술은 곱고 희디흰 숨결과 해풍에 닿은 어와 어 사이에 공중은 휘돌아 돌고 기어코 닿은 해저는 뜨겁기만 하다. 거기에 내리 닿은 무쇠 닻, 사랑의 입말은 핏물이 다 빠져나간 짐승의 마른 혈관이다. 언뜻 김광균의 설야가 스쳐 지나간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에 속 타는 심정이겠다. 네 알몸처럼 내 살 곁에 누워 바스락거리는 어둠이었다. 새벽녘, 먼 지층으로부터 여진처럼 울려오는 찬 물소리,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김광균 雪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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