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마*/김완서Kim Won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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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 250411」
율마*/김완서Kim Wonser
며칠 전 사둔 화분을 꺼내 분갈이한다 키 큰 화분을 주문했는데 바닥 깊은 화분이 왔다 화분의 관점이란 손을 넣어보는 일, 화분은 비밀 많은 사내 같기도 하다
군데군데 누런 잎이 번져 있는 율마, 한번 말라버린 잎은 재생되지 않는다고 식물도감은 사실에 충실하고 있다 생장이란 물과 볕을 맞춰주라는 게 아니라 눈을 맞춰주라는 말
지켜볼 때마다 물이 뚝, 뚝, 떨어지는 연습을 했다 어딘가 고였지만 이유는 몰랐다 그런 동공을 본 적이 있다 더 이상 미안하지 않아 마주 볼 수 있었던, 내가 누구일 수 없을 때 조금 기뻤다
물이 잘 빠지도록 화분 바닥에 얇게 자른 스티로폼을 깐다 손이 깊다 그의 아내는 아이와 눈을 맞춰보지도 못한 채 산욕으로 죽었고 그는 아이와 눈을 다 맞춰보기도 전에 우울증으로 죽었다 연락을 받고 달려간 빈방에서 나의 보호가 필요했던 건 창틀에서 말라가던 율마 뿐이었다
네 맘 알아, 한 적 없는 내게 남은 일처럼
뚝, 뚝,
마른 잎을 잘라내고 율마를 옮겨 심는다 그래야 줄기에 새순이 돋는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감의 설명서를 그대로 따르는 일, 잘린 잎들이 바람에 몇 걸음 날아갔다 쌀쌀하고 알 수 없는 방향이었지만
봄 쪽이라 믿는다
* 율마(Wilma, Monterey cypress) : 측백나뭇과의 식물/ 김포신문 250411 기고
(시감상)
김춘수의 ‘꽃’을 읽는 느낌이다. 눈을 맞춰주라는 본문의 행간과,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라는 꽃의 행간이 같은 맥락이다. 존재에 대한 의미, 생명에 대한 경건, 그리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 율마를 옮겨심는 시인의 감수성이 현대 시인들이 배워야 할 대상물에 대한 바른 경외심이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너를 나를 서로 보호하고 보듬어 주라는 조물주의 박애적 생명주의 일지도 모른다. 봄이다. 가끔 눈을 맞춰주자. 율마든, 하늘이든, 이웃이든, 내 속의 나에게든, 따듯해질 것이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김완서 프로필)
La Quinta, California 거주, 시나무/창작과 사회 동인
김완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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