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서명 =이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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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서명
=이동욱
은행 창구에서 나는 당신과 마주 앉아 수많은 확인서와 동의서에 이름과 서명을 남긴다. 내가 남긴 것은 그게 다인가. 모니터를 보면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실내는 쾌적하고, 우리는 묵묵히 각자의 일에 몰두한다. 몰두하면서 듣는다. 지금도 밖에는 시위하는 사람들. 민중가요를 틀고, 그 노래는 대학생 때 들었지. 변한 게 없구나. 그들은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지금은 퇴근 시간. 하지만 우리는 여기 앉아 있지. 각자의 업무를 보면서. 성실한 납세자로서 나는 통장 개설을 위해 왔다. 내 모든 정보는 일사천리로 처리된다. 그런데 왜 나는 경비원이 허리에 찬 총이 눈에 띄는가. 유심히 보는 사람으로서 소파에 앉아 시계를 보고, 세계환율을 걱정스레 쳐다보고, 텔레비전은 지방 공장 화재 소식을 알리고 있었는데, 나는 왜 경비원 허리춤에 매달린 총에 관심이 더 가는가. 지루하겠지. 여기는 무해하고 정해진 목적을 가진 사람만 오는 곳. 당신 마스크 속 표정이 궁금해. 그때 갑자기 복면을 쓴 한 무리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온다면, 세계환율은 여전히 바닥을 치고, 공장은 끝까지 불타겠지만, 나는 누구보다 먼저 바닥에 엎드릴 것이다. 차가운 바닥에 볼을 붙인 채, 그때도 경비원의 총을 쳐다보겠지. 사랑하는 당신을 생각하겠지.
다 됐나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한 손으로 유리문을 밀고 나서다 문득 아는 사람을 만날 것만 같다. 사람들이 건물 입구에서 묵묵히 스피커를 트럭에 싣고 있다.
문학동네시인선 227 이동욱 시집 우리의 파안 080-081p
얼띤 드립 한 잔
시제 ‘마지막 서명’에서 서명은 자기 이름을 써넣는 것(署名)이다. 이외 맹세한다는 뜻의 서誓도 경계하면서 읽을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은행 창구에서 나는 당신과 마주 앉아 수많은 확인서와 동의서에 이름과 서명을 남기지만, 진정 내가 설 곳은 없다. 몰라, 사실 지금껏 살아본 결과 정말이지 나를 위해 살았던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로지 은행 이자를 갚기 위한 어떤 몸부림은 아니었던가 하면서 원금은 일절 한 푼어치도 갚지 못했다. 15년째 사계를 대하고 시계에 조아리며 사는 헐, 겉보기에는 쾌적하고 자기 일에 묵묵히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속은 하나도 없다. 바깥은 민중가요를 부르듯이 오로지 내 목줄만 당기고 남들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하고 남들보다 더 늦은 시간에 귀가한다. 왜 그럴까, 민중가요 때문이다. 그간 낸 납세의무는 내 무게에 비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냈으며 시간은 흐르는 꿀처럼 벌떼만 더 불러모으는 것 같다. 다 뜯긴 꽃술처럼 하염없이 피어 있어야 할 바닥은 무엇을 더 긁어모아야 할지 고민이고 마스크는 또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이기 위한 발악을 준비한다. 다 됐나요? 히히 인제 그만하시죠. 그러게 말입니다. 이번은 진짜 될 것 같습니다. 한 번만 더 믿어보시죠. 더 중요한 건 그간 믿었던 사실을 수포로 끝냈다는 것 또 다른 거품이 어찌 보면 물밑에서 굼뜬 건 어쩌면 삶에 대한 하나의 희망이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죽지 않았다는 건 네가 여전히 보고 있으니까 마지막 남은 줏대를 세워보고자 한 손으로 투명하다 못해 뻔히 보이는 세계인 유리문을 밀고 나선다. 다른 한 손의 결박은 조금도 나아진 것은 없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내 삶을 찾고 싶은 욕망은 나는 자연인이다며 외치며 산속에 들어가 사는 그런 류 보다는 비교적 가족적이다. 나는 과연 가족을 살렸던가, 좀 더 후하고 좀 더 풍족하고 좀 더 여유를 갖는 시간을 지녔던가, 그냥 오지에 나와 오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쾌적한 삶을 쫓는 이름을 열심히 닦았을 뿐이다. 저기 저 번지르르한 똥구멍에서 떨어지는 탄알에 오늘도 불발이었고 나는 또 죽어라 뛰는 척 해 본다.
다 됐나요? 다 되어 갑니다.
정말이지 내 삶을 살고 찾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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