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물/ 박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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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물/ 박설희
“올해 첫물이에요”
비닐봉지에 꽁꽁 싸맨
감자 몇 알과 상추를 내민다
까맣게 그을린 손등과 얼굴로
비닐봉지를 푸는데
씨를 뿌리며 흥얼거린 노랫소리 들린다
잎과 줄기가 피어나리라는 부푼 가슴,
긴 열기 견디고 스며드는 어스름이 고여 있다
울컥,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첫물의 시간들
풋내 나는 걸음걸이
두근거리는 심장
시디시어 입에 침이 고이는
떫고 까끌거리는
첫 입학, 첫사랑, 첫 키스, 첫 월급, 첫 출산
첫 죽음까지
첫물은 그렇게 온다
혼란 한 잎, 설렘 한 잎, 외로움 한 잎, 불안 한 잎.
우박에 찢기고 비바람에 휘청여도
한밤중에도 꺼지지 않는 별빛, 다정하게 오가는 햇발, 귓속말로 다독이는 봄비
그와 나, 올봄을 처음 맞이하는 첫물
푸른 잎맥 같은 하루하루 지으며 자라는 중인데
(시감상)
파종하는 일, 그것은 막힌 둑을 열고 봇물을 쏟아내는 일이다. 가 보지 못한 미지의 문을 여는 것이다. 문턱을 넘어 까맣게 그을린 손등을 지나 몇 개의 태풍과 천둥과 벼락이 섞여 만삭이 되면 그해 첫아이가 태어난다. 울컥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불안과 외로움을 견딘 장마의 시간, 첫물이 눈물처럼 와르르 쏟아진다. 산도를 벗어난 아기의 첫 울음소리. 벗겨진 살갗처럼 아리다.
(시인프로필)
박설희 / 1964년 강원도 속초 출생. 성신여대 국문과와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 졸업. 2003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꽃은 바퀴다』『가슴을 재다』『우리 집에 놀러 와』, 산문집 『틈이 있기에 숨결이 나부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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