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피정 1 / 신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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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피정 1 / 신달자
영하 20도
오대산 입구에서 월정사까지는
소리가 없다
바람은 아예 성대를 잘랐다
계곡 옆 억새들 꼿꼿이 선 채
단호히 얼어 무겁다
들수록 좁아지는 길도
더 단단히 고체가 되어
입 다물다
천 년 넘은 수도원 같다
나는 오대산 국립공원 팻말 앞에
말과 소리를 벗어놓고 걸었다
한 걸음에 벗고
두 걸음에 다시 벗을 때
드디어 자신보다 큰 결의 하나
시선 주는 쪽으로 스며 섞인다
무슨 저리도 지독한 맹세를 하는지
산도 물도 계곡도 절간도
꽝꽝 열 손가락 깍지를 끼고 있다
나도 이젠 저런 섬뜩한 고립에
손 얹을 때가 되었다
날 저물고 오대산의 고요가
섬광처럼 번뜩이며 깊어지고
깊을수록 스르르 안이 넓다
경배 드리고 싶다.
(시감상)
가톨릭학생회 소속으로 활동하던 그 시절, 우리는 낙타도 없이 타클라마칸 혹은 고비를 향해 고삐를 쥐었다. 발목이 뻘처럼 푹푹 빠지는 붉은 모래가 싸락눈처럼 흩날리는 적기뱃머리에서 우리는 스스로 세상의 정의라고 믿었고 선봉에 서서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모래폭풍이 우리의 발목에 쇠사슬을 채울 때마다 미래는 셀로판지처럼 불투명한 형형색색이었다. 우리들의 시야가 셀로판지를 투시할 즈음 우암동 가파른 고갯길을 올랐다. 사랑의 선교 수사회, 그 나선형 계단을 오르내리며 우리의 언어는 수증기처럼 증발하기 시작했고 내 마음속 깊이 박힌 애매모호한 화두들, 누구 할 것 없이 우리들은 스스로 입다물기 시작했고 진리를 간구하는 수행자처럼 고요는 메마른 가슴을 열고 풍경소리처럼 스며들었다. 때론 열 마디의 말보다 한 순간의 침묵이 우리를 뜨겁게 불사른다는 것을 피정을 통해 어렴풋이 맛을 본 눈 부시게 푸른 빠닥빠닥한 그 소지(燒紙)의 시절..........
(시인프로필)
경남 거창에서 출생, 부산에서 고교 시절을 보내고 숙명여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평택대학교 국문과 교수,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거쳐 숙명여대 명예교수와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문화진흥정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시와 연애하던 대학 시절의 열정으로 1964년 《여상》여류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으며, 결혼 후 1972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를 게재하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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