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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묵(破墨) / 이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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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안희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227회 작성일 16-04-07 01:31

본문

파묵(破墨) / 이인주


한 자루의 붓도 쥐어 주지 않고 스승은 나를 문전에서 내쳤다
필생을 먹처럼 살거라
캄캄했다
먹이라니, 몸으로 황칠을 하란 말인가 어디에다?
살결 같은 화선지 한 장 내려 받지 못한 나는
사족이 묶인 백서로 내팽개쳐졌다
발묵도 익히기 전 파묵이라니!
팽나무 가지가 언 하늘을 쩡, 후려치는 혹한이었다

가도 가도 깡통인 탁발
자리를 잡아도 자리를 털어도
먼지 한 점 날리지 않는 茫茫寒天
나를 얼려 나를 보존할 맥문동 관절이었다
궁하면 통한다는 도리도 비껴난 아수라였다

붓도 화선지도 없는 화공이
그림 그릴 생각을 하면
옥쇄도 없는 파천황이 마음 깊숙이 자라는 법
세상에 놓인 그 어떤 법도도 스스로 길을 벗어난다
개발괘발 걷지 않아도
모든 길들을 빨아들인 먹 한 자루가
캄캄함을 깨어 스며나는
백광으로 농담을 밝힌다
살을 에는 아픔도 부드럽게 갈아
일필휘지로 내리긋는 무명의 빛



* 파묵 : 현대시에 적용된 그러데이션(Gradation) 기법


1965년 경북 칠곡 출생. 경북대 화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2006년 <서정시학> 등단. 신라문학대상, 평사리문학대상 수상


'파묵(破墨)'이란, 동양 고유의 수묵화 기법 중의 하나로서
먹(墨)의 바림을 이용하여 입체감을 표현하는 화법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먹의 바림이란 명암의 점진적 이행을 의미하는데
현대미술에서는 흔히 그러데이션(Gradation)이라는 용어로 환치하여 쓴다.

이인주의 시,' 파묵(破墨)'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결정적 단초가
바로 흑색에서 백색(바탕색)으로 이행하는 그러데이션기법이다.

시적 화자는 스스로를 "팽나무 가지가 언 하늘을 쩡, 후려치는 혹한"의 엄동설한에
스승에게서 내쳐진 캄캄한 먹(墨)과 같은 존재로 인식한다.

인공의 부산물로서 시 본문에 제유(提喩)된 화공, 붓, 화선지등이 아닌
원형질로서의 먹이 함의하는 바는 예술가의 예술혼이 예술작품으로 체현되기 이전의
카오스적인 "캄캄한" 양상을 띠고 있다.

시적 화자는 예술가의 예술혼이 발아하여 예술작품으로 발화되는 도상에서
스스로를 수행에 별 진전이 없는 빈 "깡통" 소리만 요란한 "탁발"승으로 빗대어 자학하거나,
‘먼지 한 점 날리지 않는 망망한천(茫茫寒天)’ 아래 잡초처럼 모진 목숨만 연명하는
겨우살이 풀인 "맥문동"으로 비하하기도 한다.

궁하면 통한다는 단순한 명제도 요령부득의 캄캄한 현실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뿐임을 뼈저리게 실감하며 자괴감의 "아수라"에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으로 체화된 시적 화자의 잠재태로서의 예술혼이
끝내는 "파천황(破天荒)", 즉 천지가 아직 열리지 않은 혼돈한 상태를 깨고,
이전에 그 어떤 예술가도 그려내지 못한 독창적인 예술작품을 생산해 낼 것임을 확신한다.

이러한 확신이 가능한 이유는 이 단계에서의 먹은 이미 예술가로서의 지난했던 고행과
아수라를 관통하여 "모든 길들을 빨아들인 먹 한 자루"로 거듭났다는 인식의 전환 때문이다.
"모든 길을 빨아들인 먹 한 자루"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시적 화자의 "팽나무 가지가
언 하늘을 쩡, 후려치는"듯한 매섭고 깊은 사유와 다시 조우하게 된다.

먹의 연원이 주검의 연료를 태운 그을음을 모아 만들어진다는 것을 상기할 때,
먹은 만물의 죽음과 내통하는 모든 길의 종착지인 동시에, 먹이 화공의 예술혼으로 체현되어
예술작품으로 승화되기 시작할 때에는 잠재된 모든 길의 출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인주의 시 '파묵(破墨)'은 제목의 중의성과 본문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구체성이
날줄과 씨줄로 유기적으로 정교하게 직조된 수작(秀作)이다.

먹(=어둠,몸)을 깨트린다는 파묵(破墨)이라는 제목 자체의 의미망 위에,
이 시의 또 다른 제목이기도 한 전통 수묵화의 파묵(破墨)기법으로, 즉 그러데이션기법으로,
시의 기승전결을 완벽하게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즉, 첫 연의 "캄캄"에서 출발한 시각적 이미지이자 시적 화자의 내면적 심리상태가
마지막 연에서는 "백광" 혹은 "무명의 빛"으로의 명암의 점진적 이행을 매끄럽게
재구축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과학적 사실은 캄캄한 어둠과 밝은 빛은 자웅동체라는 것이다.
색의 3원색인 파랑,빨강,검정(C,M,Y)을 합치면 검은 색이 되지만
빛의 3원색인 빨강,파랑,검정(R,G,B)을 합치면 흰빛이 된다는 사실이다.

색이 빛을 흡수하느냐 반사하느냐의 차이에 따른 시각적 변화인 것이다.
"캄캄함을 깨어 스며나는~ 무명의 빛"은 예술혼이 어떻게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는가에 대한
깊은 사색의 틀을 제공함과 동시에,온몸으로 시를 밀고 나가겠다는
이인주 시인의 결의에 찬 시론이기도 하다.

이 시의 아쉬운 점 하나는 난해한 한자의 관용어 사용이 빈번하여
독자제위들께 자칫 현학적으로 비춰지거나,시의 독해를 방해하는 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을까하는 작은 우려감이다.


                                                                                                 (단평 - 김봉식)

- 2009년 정표 예술 포럼 무크지 창간호 <정신과 표현> 에서 -


<시를 읽고, 내 나름의 한 생각>

위의 평자는 혹시 느껴질지 모르는
현학적 분위기의 오해를 말미에
노파심으로 비추었으나.

시를 일독(一讀)한 느낌은
그런 걱정은 접어도 좋을 듯 하다.

'파묵'이란 언어의 변이를 통한
자명(自明)의 세계에 도달한 것만으로도
이 시는 할 말을 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둘러보면,
그 어떤 자명에도 이르지 못하고
언어의 착란, 전도 및 이화(異化)작용으로 인해
독자들로 하여금 난시형태에 이르게 하는
시편들이 그 얼마나 많던지.
(물론, 그 범주에는 내 졸시들도 포함되고)

다소 과찬의 평이란 느낌도 있지만,
대체로 평자의 말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새삼, 시인이 견지해야 할 자세에 관한 각성과
그 시적 통찰에 공감을 표한다


                                                                                 -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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