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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고 싶은 시에 간단한 감상평이나 느낌을 함께 올리는 코너입니다 (작품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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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뜯는 이 빵은 / 딜런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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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앙보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2,122회 작성일 16-04-25 21:33

본문

내가 뜯는 이 빵은              / 딜런 토마스



내가 뜯는 이 빵은 전에 귀리였다.
이국 땅 나무에 매달렸던 이 포도주가
그 열매 속에 뛰어들었다.
낮에는 사람이 밤에는 바람이
그 곡식을 쓰러뜨렸고, 그 포도의 기쁨을 파괴했다.

한 때 이 포도주 속에서 여름 피가
덩굴을 장식한 살 속으로 쳐들어갔고,
한 때 이 빵 속에서
귀리는 바람 속에서 즐거웠는데,
인간은 태양을 부수고, 바람을 끌어내렸다.

네가 쪼개는 이 살, 네가 혈관 속에서
황량하게 만드는 이 피는
관능의 뿌리와 水液에서 자란,
귀리였고, 포도였다.
내 포도주를 네가 마시고,
내 빵을 네가 물어뜯는다.

-----------------------
  딜런 토마스 약력 (1914-1953)
영국 스원시 태생. 20세 때 첫시집 『18편의 시』로 천재 시인으로 인정받음.
이어『25편의 시』『사랑의 지도』『죽음과 입구』등과『딜런 토마스 전시집』으로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시, 소설, 극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적 기질을 발휘하였으나 미국에서 낭송여행 중 39세로 요절함.

** 감상평 **

 우째 제가 좋아하는 시인이나 화가는 전부 요절입니다. T.T

감상평은 없고요, 자연친화적이어서 도시인에게 해방과, 그 해방을 질투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잔혹성? 그 정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출장길 동반 시,로 그대로 어울립니다.
이 시도 생산년도가 꽤 오랜데, 아 다시금 현대시작에 좌절합니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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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안희선님의 댓글

profile_image 안희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딜런 토마스는 참, 흥미로운 시인이지요

故 장영자 교수는 말하길,
그는 20세기가 배출한 이채로운 시인중에 하나라는 느낌을 피력했던 것도
기억나고..


삶 속에서 늘 죽음을 껴안고 있던 시인..
(역설적으로, 그래서 불꽃 같은 삶을 살고 간 시인)


간만에 그의 시를 대하며,
시인에 대한 좋은 글이 있어 옮겨봅니다


----------------------------------------


몸의 언어, 딜런 토마스를 찾아서
                                                -오민석

토마스는 우리 시대의 가장 시적인 시인이었다. 그는 시인답게
 말했고, 옷을 입었으며, 행동하고, 살았다. 그는 무모하였고,
불꽃처럼 타올랐으며, 불경스러웠고, 순진하였으며, 추잡스러운
 술꾼이었다. 그는 “시인의 원형”이었다.
-데이비드 데이치스(D. Daiches)


 1. 들어가며-웨일즈, 술, 섹스

 내가 딜런 토마스(Dylan Thomas)를 처음 읽은 것은 대학 4학년 때, 그러니까 벌써 24-5년 전의 일이다.
당시 문학청년이었던 나의 머리는 소위 민중문학을 꿈꾸었으나 정작 나의 펜 끝에서 씌어진 시들은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것들이었다. 그 난해함과 추상성이 사실은 내 정신의 가난함을 감추기 위한
지적 위장물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독과 잡학의 세월 어느 가운데 나는 정말 우연히도 딜런 토마스를 만났던 것이다.
그의 시 여시 난해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 난해함은 지적 위장이 아니라 원시적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해함은 그의 세계관이었으며 그의 세계 안에서 온갖 이질적이고 상호모순적인 것들은 서로 충돌하면서도 하나가 되어 있었다.
모순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원리로 끌어안는 그의 시편들은 옳음과 그름, 선과 악, 밝음과 어둠의 선명한 이분법에
토대해 있던 나의 세계관을 통째로 흔들었다.
그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영미권의 다른 시인들, 즉 엘리어트, 오든, 예이츠 등과 확실히 구별되는데,
이는 자신에 대한 그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드러난다.

“첫째, 나는 웨일즈인이다. 둘째, 나는 술고래다. 셋째, 나는 일류를, 그 중에서도 여자들을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웨일즈어를 할 줄 몰랐지만, 웨일즈의 항구도시에서 태어났고 웨일즈의 전통 속에서 자라났다.
그는 다른 앵글로 색슨 시인들보다 훨씬 더 원시적이고, 더 신비적이며, 더욱 제의적인 전통 안에 서 있다.
또한 그가 자신을 술고래라고 묘사한 대목은 그의 정신구조의 한 편린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가 그렇게 좋아했던 술은 결국 39세의 그를 결국 거리의 알콜 중독자로 쓰러트렸지만, 그의 정신은 늘 술이 상징하는 바,
반(反)이성, 반(反))문명, 반(反)지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이성과 문명이 대상을 끊임없이 분석(분해)하는 것을 혐오했으며,
이성에 의해 그렇게 이분화된(죽음/삶, 빛/어둠, 등) 항목들이 사실은 서로 동종의 것이거나 교환 가능한 것임을 거꾸로 역설하였다.

그의 시는 합리성을 조롱하고 구문을 파괴한다. 그가 인류를 특히 여성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한 것 역시
그의 시세계가 다름 아닌 섹스에 대한 집요한 관심의 소산임을 보여준다.
섹스는 그에게 있어서 생명의 원천이자 동시에 생명 파괴의 힘이다.
그의 시는 어찌 보면 삶의 기본적인 동력으로서의 섹스에 대한 탐구이다.

2. 토마스의 시와 웨일즈의 전통

토마스의 시가 널리 웨일즈의 전통 속에 있다는 사실은 많은 논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이지만
애커만(J. Ackerman)은 웨일즈 시의 전통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한다.

그 첫째는 웨일즈 시가 운율, 리듬 등, 음성적 차원의 기술을 매우 중시한다는 것이다.
웨일즈 시에 있어서 음성은 의미만큼이나 중요하다.

둘째는 웨일즈 문학이 실재(reality)의 양면성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즉 혼란 속의 통일, 삶과 죽음의 동시성, 과거와 현재로 분리된 것이 아닌 시간의 연속성 등, 웨일즈 문학은
우리의 삶과 존재가 격설과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셋째, 웨일즈 문학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주제들을 내면화시키고 있다.
성경은 웨일즈 계열의 시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토마스가 구사하는 이미지들은
많은 경우 성경에서 빌어 온 것들이다.

토마스의 시들이 겉으로 볼 때 방만하고 자의적이며 혼란스런 구문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엄격한 장인기질에 의해 통제되어 있다는 사실은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는 바이다.
토마스의 시와 웨일즈 문학의 전통 사이의 상관성을 부인하는 논자인 모드(R. M명) 조차도
토마스가 시를 쓸 때 음절수의 규칙성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는지에 주목한다.

가령 <시월의 시>는 각 10행으로 된 도합 7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는 비교적 긴 시인데, 각 연의 각 행이 사용하고 있는 음절수는
제 6연의 6번째 행이 한 음절이 더 많을 뿐(13음절), 모든 연의 각 행은 (즉 총 70행 전부가) ‘9. 12, 9, 3, 5, 9’의 동일한
음절수를 가지고 있다.

토마스의 시가, 그리고 그의 생활이 겉으로는 매우 자유롭고 무절제해 보이지만,
이는 그의 시가 얼마나 엄격한 규율에 의해 내적으로 통제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존스(G. Jones)는, 토마스의 시들이 “교묘한 운율의 사용, 자음과 모음의 아름다운 화음뿐만 아니라
매우 혹독한 규율에 의해 씌어졌다는 점에서 웨일즈적이다”라고 말한다.

토마스는 36세가 되던 1950년경부터 수차례에 걸쳐 미국을 중심으로 시낭송 여행을 했으며
그의 정열적이고도 매력적인 음성은 청중들을 사로 잡았다. 마치 먼 옛날 웨일즈 지방의 방랑 시인처럼
그는 자신의 시들을 낭송하며 거리를 떠돌았고, 방랑여행 중 누적된 피로와 과도한 음주로 객사했다.

그의 시들은 모순을 통합하고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강제로 연결시킨다.
애커만은 웨일즈 문학의 전통이 이와 같은 존재의 이중성에 토대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많은 논자들에 의해 인용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은 토마스의 이와 같은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초록 도화선으로 꽃을 몰아가는 그 힘이
          내 초록 나이를 몰고 간다; 나무의 뿌리를 말리는 그 힘이
          나의 파괴자이다.
          하여 나는 구부러진 장미에게 말할 수 없네
          내 청춘도 똑같은 겨울 열병으로 굽어버렸다는 것을.
                        -<초록 도화선으로 꽃을 몰아가는 그 힘이>중 부분


여기에서 “초록 도화선”이란 꽃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나무의 줄기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는 식물의 줄기를 폭발물의 도화선(퓨즈)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도화선은 나무에게 생명력을 공급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무를 죽음이라는 종말(폭발)을 향해 서둘러 몰고가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무를 살리면서 동시에 나무를 죽이는 (“나무의 뿌리를 말리는”) 힘이다. 그것은 내 “초록 나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지만
동시에 나를 “파괴”하는 자이다. 이 초록 도화선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서 장미의 운명과 내 청춘의 운명은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똑같은 겨울 열병”으로 굽어 있는 것이다.

한편 토마스의 비유가 독특한 부분은 바로 “겨울 열병(wintry fever)”과 같은 역설적 표현에서이다.
겨울의 차가움과 열병의 뜨거움을 강제로 연결시키는 토마스의 상상력은 그대로 그의 세계관을 구성한다.
그가 볼 때 차가움과 뜨거움은 별개의 것이 아니며, 삶과 죽음 역시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삶을 몰아가는 힘이 사실은 죽음에 이르는 힘이라는 이 통합적 혹은 역설적 우주관은
고스란히 토마스의 세계관의 폭과 깊이를 형성한다.


우리는 또한 그의 시들이 본질적인 의미에서 종교적인 내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의 종교적 지향 자체를 곧바로 웨일즈의 전통과 연결시키는 것은 때로 단순하거나 혹은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굳이 웨일즈의 전통이 아니더라도 종교적 성찰은 얼마든지 가능할 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웨일즈의 신학적 전통이 갖고 있는 독특한 사유체계이다.
애커만에 의하면 웨일즈의 신학관은 헤브라이 전통에 잇닿아 있는 것으로서 모든 생물, 즉 동물과 식물과 인간을 별도가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앞에서 장미와 인간의 삶을 동일한 원리의 지배를 받는 존재들로 묘사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또한 헤브라이의 전통에 의하면, 사물들은 그 배후에 이데아를 가지고 있는 단순한 현상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충분히 신성하다. 한 마디로 이 세계의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그 자체 신성하다는 것이다.

그의 시가 일정하게 종교적 성찰을 담고 있다는 주장은, 그의 시와 삶의 외연이 보여주는 분방함에 비추어 볼 때, 의외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분방한 상상력들은 근저에서부터 종교적 상상력과 연결되어 있다.

1952년 <시선집 1943-1952>의 서문에서 그는 “여기에 있는 시들은 그 모든 미숙함과 결점들과 혼란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위해 쓰여졌다”고 고백하고 있다.

가령 <내가 떼어 내는 이 빵은>이라는 시는 처음부터 기독교의 성만찬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내가 떼어 내는 이 빵은 한 때는 귀리였지
          이 포도주는 이방의 나무 위에서
          그 열매로 뛰어들었고
          ...중략...

          한 때 이 빵 속에서
          귀리는 바람 속에 즐거웠고
          인간은 태양을 깨뜨리고, 바람을 잡아당겼지

          네가 떼어내는 이 살, 네가 혈관 속에서
          황폐하게 만드는 이 피는,
          한 때 귀리였고 포도였어
          관능적 뿌리와 수액에서 태어난;
          네가 마시는 나의 포도주, 네가 떼어 무는 나의 빵.

이 시에서도 우리는 빵과 포도주, 그것의 원료인 귀리와 포도, 사람의 피와 살 등이
원인-결과, 과거-현재의 시간의 선적(線的)인 순서에 이탈해 아예 한 덩어리가 된 채 어울려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위에 열거한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관능의 뿌리와 수액에서 태어난 것들이고,
그 한 덩어리 안에서 순서와 위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리하여 토마스에게 있어서 관능은 외설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라는 도도한 종교성으로 승화된다.

또한 <그리고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리라>와 같은 시는 그 제목부터가 성격의 로마서 6장 9절에서 빌어온 것인데,
이 시는 강력한 생명력에 대한 예찬을 기독교적인 이미저리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총 3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연의 첫 행과 마지막 행은 계속해서
“그리고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성경의 전언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리라.
          바다의 굴곡 아래
          오래 누워 있는 자들 바람처럼 죽지 않으리라.
          고문대에 뒤틀려 힘줄이 끊어져도,
          바퀴에 가죽으로 묶여도, 그러나 그들은 부서지지 않으리라;
          저들의 손 안에서 신앙이 두 동강 나도,
          일각수의 악들이 그들을 관통해 지나가도;
          모든 것이 다 산산조각 나도 그들은 부서지지 않으리라;
          그리고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리라.

                                - <그리고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리라> 부분


아마도 이와 같은 기독교적 메시지가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런던에서 불 타 죽은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기를 거부함>이라는
시의 마지막 행일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행은 “최초의 죽음 이후에, 다른 죽음은 없다.”라고 끝나고 있는데,
이것이 함축하는 바를 우리는 위의 <그리고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리라>와 연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제목의 출처인 성경의 로마서 6장 8-9절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우리는 그와 함께 또한 살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는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며
죽음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시에서 말하는 “최초의 죽음”이란 바로 예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죽음에 신앙적으로 동참한 사람에게 그 이상의 “다른 죽음은 없다”라는 뜻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이 시의 화자가 “런던에서 불 타 죽은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은,
토마스에게 있어서 이처럼 죽음은 언제든지 삶으로 전치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3. 섹스 그리고 죽음

토마스의 언어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담론을 교란시키는 몸의 언어이다.
그것은 이성이 만든 이분법을 해체하며, 과학적 분석이 도달하지 못하는 통합의 우주관을열어준다.
토마스는 관제화된 지식을 거부하며 모순의 몸으로 이 세상의 바닥을 기어간다.
그것은 고통스럽되 즐겁고, 생명에 가득 차 있되 죽음을 향해 있다.
몸은 욕망이고 생명이고 죽음이 자라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섹스는 생명의 힘이자 앞에서 논의 했던 시, <초록 도화선으로 꽃을 몰아가는 그 힘이>에서처럼
죽음을 향한 불꽃 축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경계가 있되 그 모든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를 넘나들되 다시 경계를 만드는 이 철저하게 자기모순적인 언어,
이것이 바로 토마스의 몸의 언어인 것이다.

그가 섹스에 대해 그렇게 집요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도 그의 언어가 근본적인 의미에서 몸의 언어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사랑의 마찰에 간지럼 당할 수 있다면,
          자신을 위해 나를 훔친 사기꾼 같은 여자가,
          내 붕대 감은 끈을 자르고 그녀의 밀집 사이로 깨고 들어온다면,
          만일 소가 새끼를 낳듯 빨간 간지럼이
          여전히 내 허파에서 웃음을 긁어낼 수 있다면,
          나는 사과도 홍수도 두려워 않으리
          봄의 나쁜 피도 나는 겁내지 않으리.

                          -<만일 내가 사랑의 마찰에 간지럼 당할 수 있다면> 부분


 이 시는 총 7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에 인용된 부분은 그 첫 번째이다.
 “소가 새끼를 낳듯 빨간 간지럼이/여전히 내 허파에서 웃음을 긁어낼 수있다면”이라는 표현은
너무나도 생생한 (몸의) 질감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이런 수사법은 아마도 토마스의 시편들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아주 예외적인 것이다.
어찌 됐든 첫 번째 연은 난봉꾼과 같은 사랑을 할지라도 그것을 할 수만 있다면 “사과”도 “홍수”도 두렵지 않다는,
섹스에 대한 화자의 강렬한 욕망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사과는 원죄, 그리고 홍수는 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기독교적 기표들이다.
원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상쇄할 정도로 큰 화자의 성적 욕망은 그러나 마지막 연에 가면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

          그렇다면 무엇이 마찰인가? 신경줄 위의 죽음의 깃털?
          너의 입, 나의 사랑, 키쓰 속의 엉겅퀴?
          나무 위의 가시덤불로 태어난 내 친구 예수?
   
          <탄식> 같은 시에서도 섹스는 중요한 화두로 등장한다.
   
          내가 바람둥이 소년하고도 남았을 때
          그리고 교회의 검은 가래침 같은 존재였을 때,
          (여자 때문에 죽어가는 늙은 쇠꼬챙이 한숨지었지)
          나는 구스베리 숲에서 부끄러이 발끝으로 걸었고
          무례한 올빼미는 고자질하는 년처럼 울어댔네,
          큰 여자애들 당나귀 풀밭에 볼링공처럼 쓰러질 때
          나 얼굴 붉히며 건너 뛰었지,
          시소놀이하던 일요일 밤마다 나는 사악한 눈으로
          아무에게나 연애를 걸었으며,
          밤새도록 사랑하고 또 떠날 수 있었네
          초록 잎새 속에서 약식 결혼한 모든 아내들을
          석탄처럼 어두운 덤불 속에서 그리고 그들을 울게 내버려두었지.

이 시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시적 화자의 일생을 단계별로 그리고 있다.
그리하여 마지막 연에 가면 이제 더 이상 그런 생활을 할 수 없는 노인이 된 화자의 입장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더 이상 남자도 아냐.
그리고 포효하는 삶에 대한 어두운 대가만이 있을 뿐이지
(낯선 이들 때문에 죽어가는 늙은 쇠꼬챙이 한숨지었지)
비둘기 구구 우는 방안에 단정하게 저주받은 채로
 마른 몸으로 누워 나는 착한 종들의 잔소리를 듣고 있지......
왜냐하면, 오, 내 영혼은 안식일의 아내를 발견했고
 석탄처럼 어두운 하늘 속에서 그녀가 천사들을 낳았기 때문이야!
그녀의 자궁에서 나와 나를 에워싸고 있는 하피들*!
정절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경건이 노래하며,
순수가 내 마지막 어두운 숨결을 달콤하게 하고,
수치심이 그녀의 날개 속에 내 허벅지를 가리는구나,
그리고 이 모든 죽음과도 같은 덕행들이 나의죽음을 괴롭히는구나!

 *하피 : 얼굴과 상반신은 추녀이고 날개, 꼬리, 발톱은 새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존재이며 죽은 사람의 영혼을 나른다고 함.)

“포효하는 삶”을 산 것에 대한 “어두운” 대가로 병색이 완연한 채 설교자들(“착한 종들”)을 포함한 사람들(“하피들”)에게 둘러 싸여 운명을 앞두고 있는, 한 저주받은 노인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위 대목은 그러나 윤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토마스에게 있어서 죽음은  악행의 대가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스물 네 해가> 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출생의 문간에서 나는 재단사처럼 쭈그리고 앉아
          고기를 먹는 햇빛 아래
          여행을 위한 수의(壽衣)를 짜고 있었지.
          죽으려 옷 차려 입고, 관능의 활보가 시작되었었어.

여기에서 “고기를 먹는 햇빛”이란 삶을 갉아 먹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 시 속의 화자는 이미 삶의 출발부터 죽음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도 “관능의 활보”와 더불어. 토마스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이처럼 출발부터
서로 뒤엉켜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가령 <펀힐 농장>에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오, 내가 시간의 자비 아래 어리고 힘들지 않았을 때에도,
          시간은 나를 초록빛으로 잡고 죽어가게 했지
          내 비록 나의 사슬 안에서 바다처럼 노래했건만.

4. 나가며

 이렇게 보면 토마스의 시 세계는 출생, 죽음, 섹스, 종교적 구원이라는
매우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소재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독특한 이유는 이 너무나도 일상적인 항목들을 마구 뒤섞는 그의 기술에 있다.
그리고 이 기술은 기술이면서도 동시에 그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섹스는 그의 삶이자 그를 죽음으로 몰아 가는 힘이고, 종교적 구원은 죽음 안에도 섹스 안에도 있다.
그에게 있어서 출생은 임종이며, 임종은 또 다른 출생이고, 사랑은 저주이면서도 또한 평화이다.

이 극단적인 이항대립물들의 긴장 속에 그의 시가 존재한다.
그의 삶과 시가 보여주는 치열함은 이 대립물들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이 먼 거리를 줄여(대립을 해소하여) 하나로 통합하려고 하는 그의 정열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 속에서 죽음을 거부하기, 삶 속에서 죽음을 껴안기라는 그의 전략은 이런 의미에서 지적 도전이라기보다는
낭만적 실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제사(題辭)에서 인용했듯이 데이치스는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를 시인 중의 시인이요,
“무모하였고, 불꽃처럼 타올랐으며, 불경스러웠고, 순진하였으며, 추잡스러운 술꾼이었다.

그는 시인의 원형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간략한 이력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을까 한다.

1914년 10월 27일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태어남
1934년 런던으로 이주하고 같은 해 12월에 그의 첫 시집 <18편의 시>를 출간하여 비평가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 일으킴
1936년 부인 맥크라마라를 만남. 같은 해 9월 두 번째 시집 <25편의 시> 출간. 이듬해에 둘은 결혼하고 1년이 지난 후 다시 웨일즈 지방으로 이주함
1939년 맏아들 출생. 같은 해 <사랑의 지도>, <내가 숨 쉰 세계> 출간
1940년 <젊은 개, 예술가의 초상>(단편집) 출간
1943년 둘째 아이 출생
1946년 <죽음과 문턱> 출간
1949년 셋째 아이 출생
1952년 <시선집 1934-1952>출간. 생전의 마지막 시집이 됨. 미국으로 시 낭송 여행을 시작함.
1954년 네 번째 미국 시 낭송 여행 중 뉴욕의 한 호텔에서 쓰러지고, 성 빈센트 병원에서 사망함.
사후에 라디오 드라마 <은하수 아래서> 등 출간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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