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목서 / 최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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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이시향 시인
[월간 조세금융 2017. 10월호]
금목서(金木犀)
최형심
마침내 아무것도 심지 않은
발등 위로 가을이 와서 우리는 강의실로 갔다.
시월의 강의실에 앉으면 자꾸만 창문이 낮아져
생인손을 앓던 나무들이 들어와 앉고
날개를 펼친 책들이 목성을 지났다.
목이 긴 유리병이 금목서 향기에 졸고 있던 창가
남학생들은 혀가 짧은 새들의 거짓말을 기억했을까.
주술에 걸린 노트 속,
수요일의 수거함에 모인 문장에선 간혹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입술의 흔적이 발견되곤 했다.
자정의 몽타주 아래 외투를 벗고
간절해지는 간절기를 지나왔다고
낡은 자막 아래 회전하는 영사기들에게
청춘의 혐의를 물어야 했지만
우리는 그저 도서관에 앉아 빵처럼 성숙해졌다.
나날이 두꺼워지는 여권을 가진 우리는
종이컵을 물고 늘어졌고
우산을 잊은 그림자들은 나무 아래로 모여들었다.
남자애들을 그리워하면서 하얀 서류봉투 곁을 지켰다.
팝콘처럼 순결한 꿈을 가진 불법체류자가 되고 싶었다.
붉은 여권을 닮은 낙엽이 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짙은 녹색의 칠판만을 대면했다.
어느 날 눈먼 사진사가 찾아와 머리를 감겨주었을 때
오래된 종이감옥에서 한 무리의 참회자들이 걸어 나왔다.
이제는 나비를 모른 척할 나이,
눈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눈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사람 사이에서
길과 요일을 혼동한다.
신입생 시절이 창세기보다 멀다.
[감상]
모든 것이 황홀했던 그 시절, 시월의 강의실 너머로 스며들던
금목서 등황색 꽃향기는 왜 그리 아득했을까
자꾸만 낮아지는 창문으로 하늘이 날아와 앉고,
책갈피에서는 종종 눅눅한 언어들이 발견되곤 했었지
동시상영관의 흐릿한 자막 속을 타고 흐르던 이름들이여
간절기를 지나 온 붉은 기억들이여
뜨거웠던 한 시절의 혐의를 금목서에게 묻는다
(감상 : 양현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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