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하반기 《현대시》 신인상 당선작 / 신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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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하반기 《현대시》 신인상 당선작
[오디에이션 외 4편 / 신동재]
오디에이션*/신동재
*
너는 교실에 혼자 앉아 있다 자작나무 의자들이 모두 다른 빛깔을 지녔다 일회용 용기에 남은
아메리카노의 높이가 다르다 일부러 말을 걸어보는 것이 좋겠지 어제는 얼음만 앙상한 일회용
용기를 남겼네 매일 음정이 다른 악기를 만드는 중
자작나무에서 연주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직 구멍을 뚫지 않았는데
틀릴 것을 걱정하니 시원히 볼 수 없잖아 그때는 교실이 악기처럼 행세한다
하나뿐인 출입문이 어떤 맵시를 뽐냈는지 너는 진종일 본다
음파들이 다른 데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오후 세 시쯤 한 곳으로 집결한다
얼음이 줄어들 때마다 연주를 다르게 해본다 간드러진 음이 누그러들었다
*
너는 평소처럼 리코더를 분다 독주獨奏된 악기의 감정이 너에게 전해진다 의자 위에 리코더가
앉는다 고저음을 오가다가 까맣게 변해버린 자작나무들*을 밟고 한 걸음 뛰어오른다 리코더가
리듬에 따라 일어선다 불현듯 너는 허리가 지끈거린다 의자에 탈, 부착될 때마다 너는 악기를 연
주하는 것이다
너는 이리로 오라 손짓을 한다 한 번도 맞춰본 적 없는 콰르텟이 연주를 시작한다 커피가 찰방
댄다 이 텅 빈 공간도 흔들린다
*
까치발로 선 네 개의 마디
이야깃거리가 고갈되면 우르르 무너져 버린다
교실 안이 젖어 있다 빳빳해진 종아리를 협주 악기로 삼는다
한 손에 쉽게 거머쥘 수 있다
버텨주기를 바랐지만 쉽게 견딜 수 없어 무력감을 불어대며 오후 시간을 보낸다
구멍마다 묘목들이 들어앉아 바람 넣어줄 시간을 기다린다
침을 머리에 맞으면 거름이라 여긴다 너는 창문 너머의 하늘로 계속 뻗어가고 있다
빈 밥그릇을 보니 침이 흐른다 뭘 그렇게 꿀떡꿀떡 삼킨 것일까?
잡을 것도 툭툭 내뱉을 것도 없는 텅 빈 공간
연주하는 동안 너의 키는 얼마나 자랐을까? 구중중한 곳에서 용솟음치고 있다
*
묘목들이 그새 어른이 되었다 너는 입속에 다양한 크기의 얼음들을 짤랑거리며 휘파람을 분다
*
등받이에 윈드웨어를 기대본다 자작나무처럼 곧고 흰 소리를 내고 싶어 발을 포개며 힘을 준다 화
이트보드를 보며 약지로 더블홀을 오무락거린다면 소리가 하얘질지 몰라 키가 커지는 것처럼 고관
절이 자꾸 따끔거린다 일회용 용기 속으로 바람이 자꾸 들어온다 손가락들이 얼음 속에서 허우적댄다
유연하던 너의 허리는 힘없이 흰색을 흘리지 않는다
엄지, 검지로 콧구멍을 문지른다 마카펜이 뛰며 점들을 찍는다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음역으로 도약할 수 없을까
쨍하게 너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징검다리를 만난 것은 여태 그때뿐이었다
누군가의 양 손아귀에 기꺼이 사로잡힌 때를 떠올릴수록 목에는 객담이 어리어 든다
너는 너 스스로 불린 적이 있었나
*
손가락이 삼죽마냥 마디져 있다 어쩔 줄 몰라 더듬거리다가 너의 정문頂門이 천장에 닿는다
이탈음인데 왜인지 듣기 싫지가 않다
너는 돌아가다가 천장을 친친 감아버린다
미닫이문이 열린 적 없는데 너 대신 너희가 앉아 있다
*과거에 들었던 음악을 내면에 떠올려 들을 수 있는 능력.
부르트도록 쳐다보니 슬며시 움츠러드는 복부들
카페에서 앞사람의 뒤통수를 본다 앞사람이 랩톱 자판을 두드리는 것 같다 자박자박 발을 구르며 혼잣말을 쓰는 것 같다 모음과 자음의 뒤통수가 번갈아 보이는 기분 일기가 노래가 되어 구가되고 있다 앞사람의 혀가 뒤엉킨 것 같다
카페에 오는 길에 앞서가던 차를 보았다
부릅뜬 후미등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도장을 찍어 주고 싶었다
돌아볼 엄두를 내기 전에
납작하게 만들어 버려야지
이들 가운데 무엇이 제일 편평할까요 버튼 하나를 빼서 앞차에 던진다 앞차의 운전자가 뒤돌아보려는데 뒤돌아볼 수 없다 내처 직진한다 나를 반추한 지는 먼 옛날입니다 고개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뒤차가 망치로 나를 찍어대고 있다
어떻게 왔는지 나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
뒷머리를 자꾸 만져본다 칼데라 같은 것은 없는데
단체석에서 박장대소하던 아저씨가 아줌마의 뒤통수를 쳐다본다
공부하고 있는 앞사람의 흐벅진 눈빛도 보아주었으면
돌아보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정작 내 속에는 온데간데 보이지 않습니다
평평한 자판 버튼, 앞사람의 납작한 뒤통수, 짜부가 된 자동차들
앞사람의 등이 강하하고 있다
그 등은 너무 정직하다 매달려 있기 부담스럽게
아저씨와 아줌마는 김이 빠진 표정이다
그분들의 등은 입보다 솔직하다
꽉 막힌 도로에서 적색 신호등이 바뀌지 않는다
다들 쪼그려 앉아 한 방향을 바라본다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우직하기만 한 사건인가
축 늘어진 형상들이 네모에 들어차 있다
앞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면
나는 그의 등에 피켈을 박고는
거짓말처럼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뜻이 무엇인지 판단하지 말고
속았다는 것을 알아도 내색하지는 마십시오
아무런 소음이 없게 천천히 자판을 치십쇼
앞사람은 자기 앞에 앉은 사람의 뒤통수를
그 앞에 앉은 사람은 다시 그 앞에 앉은 사람의
엎드리기, 숙이기, 일어서기
비가 내리고 있다 씨수말이 주위를 살핀다 나무 아래 숨는다
엉덩이에 비를 맞는다 계속 꿈틀대며 제자리에서 발을 굴린다
이야기할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누가 있을 때는 풀만 뜯을 거면서
경사면을 타고 내려오는 낙석들 말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펄쩍 뛴다
뾰족뾰족한 잎이 죄다 떨어진다 정수리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다
그것이 말을 패줄 것 같아 온몸을 바르르 떨어댔다
흙, 자갈과 어울려 사는 어떤 키가 큰,
딱딱하던 넓적다리 살이 말의 마음을 보여주지는 않았지
마면갑을 눌러쓰고 앉아 있다 속으로는 비웃으면서 모른 체한다
엉덩이에 계속 비가 떨어진다
말뿐인 것은 별로 무섭지 않아 이히히힝 의성어나 내는 짐승같이
언젠가 받을 막수 소리를 꿈꾸며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다시 불러볼까 비가 그칠 때까지라도
빳빳한 이파리들은 꿈을 타박이라도 하듯 하루 종일 타닥타닥거리지만
아까는 비가 내렸는데 지금은 소나기가 온다
나뭇가지들이 말 등 위로 떨어지고 있다
나무 아래 있으니
뿌리째 걷고 있는 것 같아
웅크린 채 들판의 모습을 떠올린다
가지 끝으로 뛰어오르고 싶다
몽글몽글 빗방울이 맺힌 다리, 씨수말이 내게 남기고 간 선물
씨수말과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간다 둘이 같이 떠났던 유일한 원정 질주
달리지 않았을 뿐이야 말 같지 않은 말이라는 손가락질당할 일을 하지는 않았어
발굽으로 젖은 나무껍질을 매만지고 있다
발굽과 나무껍질을 숲속에 방치하면 둘 다 고독해서 금방 친구가 될 것이다
잎들이 말에게 째깍 소리가 된다 뛰지도 못하면서 엎드린 것들의 회중시계
말은 늪지대로 달려가 물에 잠긴 땅 위를 막 내달릴 수 있다
발굽 자국이 쌓여가는 흙 속에서 치츰 돌로 바뀌어 갈 수 있다
낙석이 멈추고 차가운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발굽 자국이 햇빛을 볼 때까지 그것들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나? 그의 입에서 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돌이 떨어진다 발 구르는 속도보다 훨씬 빨리
[심사위원 : 원구식 오형엽 김언 조강석 안지영]
<<신동재 시인 약력>>
1987년 출생
경인교육대학교 초등교육과 국어심화 졸업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석사 졸업.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2021년 하반기 《현대시》 신인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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