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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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FRACTAL (외4편)
장미도
바이닐은 붉은색이다 너는 신중히 지문을 고른다 그때의 RPM은 33이었다 비가 내리거나 겹겹이 두터운 목소리를 가지게 되는 날에는 45가 되기도 했다
바 자리에서는 같은 방향을 보게 된다
헤드 셸이 바이닐 위로 수평 이동을 하는 것처럼
어떤 마음은 물속에 손을 넣어 물거품을 만지는 것 같다
통유리 창 안으로 햇빛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나날이 익어가는 얼굴이 앉아 있다
밤이 오면 산은 하늘보다 어두워진다 경계를 다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둠 속에서도 왜 여기와 저기가 나뉘는 걸까
너는 빈 의자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만지면
무언가 생길 것 같은 예감
그런 것들은 오래전에 하수구 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누군가는 수영을 한다 누군가는 뜰채로 죽은 벌레를 건져낸다
빗방울이 수면을 뾰족하게 부수며 낙하한다
돌아오는 마음은 찾아가는 발걸음보다 빨랐다
옆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랑
폭이 좁은 허공에서는 왼발을 헛딛게 되고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스스로 물속에 뛰어든 개미가 있을까
손이 허공을 휘저어도 밤은 무너지지 않고
음악은 뒷면에서도 가능했다
아주 천천히 개미는
앞면에서 앞면의 이쪽으로 이동한다
헤드 셸은 늘 같은 부분에서 음 이탈을 했다
젤리의 사생활
포장지는 완성되었고 젤리는 불쑥 끼어들었다
컨베이어 벨트처럼 이동하는 회색 구름
젤리는 그저 어느 날 툭 하고 나타난 것이다
영양 정보 설명서는 젤리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했다
포장지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불필요한 긴장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유용하지만 젤리를 심리적으로 불편하게 한다는 단점이 있다 한 철학자는 젤리에게 사회적인 성분이 함유되어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으나 그 성분이 어떤 맛을 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젤리는 고체도 액체도 아니었으므로 누구에게도 해를 가하지 않았다
손가락은 말랑말랑한 젤리 사이에서 더 말랑말랑한 젤리를 고른다
젤리와 손가락을 햇볕에 전시해두면
방부 처리 되지 않은 손가락이 먼저 썩어갈 것이다
이것은 젤리에게 어떤 위로도 되지 못한다
젤리는 혓바닥을 파랗게 물들이거나 이빨의 틈새를 파고들 수도 있겠다 미각을 뒤엎은 젤리는 질리지도 않고 포장지와 함께 늙어갈 수도 있겠다
젤리는 모든 기대를 저버릴 수 있다
어제의 구름이 지나가고 오늘의 구름이 되돌아왔다
구름의 뒤통수가 같은 색이었던가 젤리는 알 수 없다
당신이 모르는 당신의 틈에서
젤리는 당신과 함께 썩어갈 것이다
젤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델타⧍ 의 방
0.
삼각형의 방 안에 D와 D`와 모르는 사람이 있다.
0.
나는 세 개의 꼭짓점 안에 있다 D와 D 사이 기울어지는 선 안에
D는 의자에 앉아 있다
0.
나는 세 개의 상상 속에 있다 어제의 밤도 휘어지는 새벽도
창밖에 비가 온다고 하자 비가 내린다
0.
D가 눈알을 굴린다 죽은 척을 하자 그날처럼 D의 칼끝이 심장을 찌르면 이미 찔렀다 하자 어쩌면 동공에 힘을 풀자 우리는 이미 사각형이라고 하자 D의 정수리에 칼끝을 찍어서 D`를 만든다 D``를 만들어 D와 엮는다 당신은 하나의 점이 된다고 하자
허공에 꼭짓점을 찍고 점과 점 사이를 접는다 방을 구긴다 우리는 방금 사랑했다고 하자 방은
0.
45도 기울어 있다 파이프를 따라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물은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
0에서 델타로
해야 하는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것이 언젠가 해야 하는 일이 되도록
나는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타원형의 손잡이를 돌린다
0.
또 다른 삼각형의 방에서
D는 의자에 앉아 있다 입을 반만 벌리고서
델타와 〇 사이에 D가 있다
0.
벽을 부수자 파이프 속으로 도망가자 아래에서 〇 위로 추락하는 원
1.
거리를 걸을 때마다 세계를 거대한 방이라고 생각했다
빗소리가 거리에 무수한 꼭짓점을 찍고 있다.
사이에 선
선은 사이에 있다 선은 선을 넘어 사이는 단발머리
나의 선은 노랑, 품 안에서 잠들고 멀리서 깬다 줄무늬를 삼키는 선, 어둡고 습한 탁자 밑에서 토악질을 한다
선은 제일 늦게 뽑힌다 머리를 넘기는 손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난다 아프지 않게 자를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아프지 않은 건 다 남의 것이다 주머니에 가위를 가지고 다닌다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 없이 시계는 나뭇잎을 떨구고 벌레는 동그란 허공을 먹고 몸에 동그라미를 새긴다 선은 서서 그네를 탄다 무릎을 굽히고 도약하는 자세가 된다 선은 뛰어오르고 몸은 남는다
모래로 만든 케이크에 나뭇가지가 꽂혀 있다 열은 부러지고 하나만 남는다 생일은 늘 한 번뿐이라서
손가락은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동그라미는 지워지고 손가락은 몸으로 돌아온다 손가락을 자르려면 손가락이 필요해서 자르지 못한다
가을과 몸은 등을 돌리고 잔다 아무렇지 않게 전구를 갈고 쏟아지고 엎어진 것들을 주워 담는다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몸이 자란다 몸은 벽에 기대어 잠들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어깨를 부딪친다
죽은 것에는 다른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 죽은 선을 죽은 선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오늘을 어제라고 부르듯이 손가락 끝에 동그라미가 남듯이
초가 타오르고 촛농이 남는다 왜 케이크에는 아무 향기도 나지 않는 초를 꽂는 걸까 잘린 머리카락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뛰어오른 건 무엇일까 이번 생은 한 번뿐이어서 다행이야 그런 생각은 생일 전후에 떠오른다
바다에 가기로 했었잖아 속눈썹이 눈을 자른다
무기명으로 발소리가 도착한다
선, 안 밟았어
레이스와
호수는 얼어붙고 쉽게 한 방이 된다 열린 창문 안쪽에는 레이스 레이스 커튼, 커튼을 찢으며 햇빛이 들어온다
커튼은 뚫리는 벽 실금이 뿌리 내린 흰 벽에 커튼의 그림자가 인쇄된다 접을 수 없는 페이지 벽은
움직이지 않는 커튼 정지한 수면
창밖이 흔들리고 갓 태어난 그림자의 얼굴이 뒤섞인다 그림자는 아니 벽은 서늘해서
고양이가 고양이의 그림자를 깔고 앉아 있다 3시에는 없었고 방문까지 닿을 것 같다가, 벗어날 것 같다가, 4시에는 약간
어떻게 약간이 가능하니 약간 숨을 쉬는 내가 말한다
고양이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림자는 거대해지고 고양이를 거대하게 삼키고 옷장을 거울을 씹어 먹는다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림자의 눈은 심장에 붙어 있다 가장자리는 모두 이빨
방을 삼키고 굳은 벽을 핥아 먹는다 수평선 깊숙한 곳에서부터 탄생한 혀로,
벽에서는 폐허의 맛이 난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레이스
레이스는 쓸모없고 출구도 없이 쉽게 찢어진다
▲ 장미도 / 1995년 출생.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2020년 《문학과사회》 신인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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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나를 잘게 쪼개도 내가 남는다 / 오은
(…전략…)
쓸모없음에서 출발해서 “생과 사의 무게를 슬쩍하”는 일, 잠시 우주가 되는 일, 신인은 우주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일 것이다. 여기가 우주인지 몰라 자기도 모르게 기울어지기도 하면서, 그런데 이 느낌이 왠지 싫지 않아서 자꾸 빙빙 돌기도 하면서.
「원정」 외 9편을 응모한 윤재성의 시는 맴도는 시였다. 어딘가를 맴돌아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시, 이것을 복귀나 귀환이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희가 돌아와 들려주었다”(「원정」)라는 구절에서처럼 보았거나 본 것 같은 매혹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결구가 주는 분명함과는 달리 갸웃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여기와 거기는 모두 미지(未知)의 상태라 세계의 형상을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환기(喚起)가 설득에 가닿으려면 붙박고 있는 공간은 선명해야 한다.
「Sunset Shake」 외 9편을 응모한 김나우의 시는 휘도는 시였다. 그는 지구든 마음속이든 어디든 뱅글뱅글 돌 수 있었다. 문장과 문장을 가로지르는 자유분방함과 차원을 넘나드는 상상력이 아니면 휘도는 일은 금세 시들해질지도 모른다. 그의 시에서 아지랑이가 걷어차이고 경계가 둥둥 떠오르는 것은 예삿일이다. 이 예삿일을 어떤 경지에 다다르게 만드는 것은 구심력일 텐데, 종종 원심력이 훨씬 더 강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소화하지 못하고 이탈하는 경우가 있었다.
「Balgetreter」 외 12편을 응모한 나헌의 시는 외도는 시였다. ‘오르간의 송풍(送風)용 풀무를 밟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표제작 제목처럼,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연주를, 외돌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외따로 돌지만 시선을 거둘 수 없게 만드는 매혹이 있었다. 반복되면서 변주되는 문장들은 묘한 리듬감을 형성하며 시의 매력을 더한층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러나 문장과 문장 사이의 긴장이 시와 시 사이의 그것으로 연결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패턴을 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부수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의지도 필요하다.
「김초롬」 외 9편을 응모한 김초롬의 생생한 목소리를 기억할 것 같다. 발화(發話)가 발화(發火)하다가 발화(發花)가 되는 순간이 인상적이었다. 「거기에 무성한 측백나무와 아카시아에 대해」 외 9편을 응모한 차현준은 문장마다 숨통을 틔울 줄 알았다. 앞으로도 그가 문장의 이랑과 고랑을 오가며 경작을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마지막 바다에서」 외 9편을 응모한 이혜리가 들려주는 말에 귀 기울이던 시간도 잊을 수 없다. 물결이 숨결이 되고 빗줄기가 빛줄기가 되는 문장을 계속 써주었으면 좋겠다.
장미도의 「Fractal」 외 9편은 감도는 시였다. 다 읽고 나면 사라지지 않고 자꾸 아른거리는 게 있었다. “스스로 물속에 뛰어든 개미가 있을까”(「Fractal」)라는 질문이 턴테이블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장면을 상상했다.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시를 쓰면서 더 많은 질문이 만들어질 것이다. 개중 어떤 것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일 것이다. “젤리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젤리는 불쑥 끼어들”(「젤리의 사생활」)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질문에서 발산해서 질문으로 수렴하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프랙털fractal’이라는 개념은 임의의 어떤 부분이 전체의 형태와 닮은 도형을 가리키는 수학적 용어다. 턴테이블 위의 엘피판은 끊임없이 돌면서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구름이 피어오르면서 ‘그 구름’이 되듯이, 문장이 문장을 끌어당기면서 ‘그 문장’에 가까워지듯이. 그래서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장미도가 앞으로 시를 쓰면서 ‘나도 몰랐던 나’를 마주하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나와 닮은 모습이 나타나 화들짝 놀라기도 하면서, 김혜순 시인이 말한 것처럼 “‘나’라는 허구를 몽땅 구겨 넣”으면서, 한 발 한 발 자발적으로 나에 가까워지면서.
나를 잘게 쪼개도 내가 남는다. 나는 남는다. 백지 위에서 본격적으로 “부재의 건축”을 시작할 당선자에게 축하 인사를 전한다. 아울러 응모해주신 모든 분께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읽으면서 정말 좋은 자극을 받았다.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시가 쓰고 싶어졌다.
_오은(시인)
⸻계간 《문학과사회》 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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