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현대시학》 신인상 당선작 _서종현, 하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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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520회 작성일 21-02-04 16:49본문
2020년 《현대시학》 신인상 당선작 _서종현, 하시안
서종현 그러나 카인의 혀에 적힌 낱말들 왜 제가 아벨의카인은 무너지는 아벨의 등을 받치며 스스로의 무너짐을 방해한다 카인의 세례는 아벨을 위한 것 낱말에게서 시작과 끝이라는 임무를 받은 낱말이 계획한 기하학 첫장부터 노예의 낙인을 준비한 오랜 책은 카인의 이마를 인두로 지진다 그것은 짐 진 자를 위해 짐 지는 자의 낙인 짐 진 자는 자신의 짐을 낙인의 낱말 위로 내려놓는다 그러므로 언젠가 짐 진 자는 짐 지지 않은 자의 후예 언젠가 짐 진 자의 짐은 낙인의 후예 그 이마 위에 놓여 지상의 십자가가 된다 수많은 카인들이 짊어진 십자가 카인의 혀가 오직 아벨을 위해 왜 제가 아벨의 카인이 되는지 묻는다 카인은 카인을 위해 무너져도 되는 것 아벨은 아벨을 위해 무너짐을 지키는 것 그러나 카인의 혀에 적힌 낱말들 왜 제가 아벨의카인의 선이 무너질 때 아벨의 선이 무너지는 것은 낱말이 정한 낱말의 율법 이미 카인은 카인의 이름을 이마에 새겼으므로, 벗어나지 못한다 카인이라는 이름의 낙인⸺ ㅅ이라는 이름의 낙인 선의 간격이다
▲ 서종현 / 2004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5년 중앙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파울의 방식 (외 2편)
하시안
당신은 오늘 내게 세 번째 파울을 선언했다 배경으로 깔리던 정오의 희망곡 안에서 나는 폭삭 주저앉고 9회 말 투아웃, 투스트라이크에 내몰린 타자처럼 당신이 만든 소문까지 받아쳐야 한다
당신이 매번 던진 돌직구에 방망이조차 들지 못한 내가 홈을 밟을 것인지, 장외까지 날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볼넷까지 허용하고 싶지 않은데 타인들은 온갖 변화구로 병살로 유도한다
은퇴경기처럼 집중하다가 현관문으로 튕겨나간 자존심 심판처럼 빗줄기가 쏟아진다 젖은 눈 속으로 빨려드는 강속구들 가슴속 스트라이크존에 정확히 꽂힌다
이별에 대한 방어율은 낮아지고 선언을 향한 타율은 높아진다 그래도 교체할 감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에 연장전 같은 표정으로 지루한 일인칭이 되어간다
지금까지 내게 어떤 사인도 주지 않고 배신한 이유가 뭐니? 뱉기만 하고 도무지 삼킬 줄 모르는 말이 터져나온 어둠이 내게 보낸 수많은 기척만이 정확했다 그러니 오늘의 승률을 숨겨야 한다
신파가 되기 싫은 나는 지금까지 비상구를 원했을까 패배자들이 모이는 드라마를 원했을까
내가 날 자꾸 경기장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그것이 완벽한 파울이 될 거라는 자명한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우리는 오늘밤 서로를 아웃시키고 있다
회전문
밤이 떠난 자리에 낮이 도착한다 밤낮이 하나라고 말해도 될까 둥글어진다는 것은 가능성의 다른 말 만남과 헤어짐이 한통속이듯 가능성도 동그라미 속에 묻혀 있어 오른쪽으로 들어가고 왼쪽으로 빠져나가 엇갈리는 문양처럼 이별이 교차하고 있다
네가 뿜는 공기는 겹겹이 투명했고 내가 껴입은 것은 번번이 서늘했다 하나의 입구와 출구라고 믿었지만 하나의 공간에서 태도가 달랐고 서로 다른 파이를 나누어가졌다
문을 통과한다는 건 다른 존재로 열린다는 것 나는 네 안에, 너는 내안에 깊이 이르지 못한 한계에서 슬픔을 모른다는 것 안쪽을 닫으면서 시차가 불어난다
사무적인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어긋난 방식으로 들락거리는 감정이 예기치 못한 틈에 자주 끼어도 신호음에 놀라 멈춰서는 일은 없다 그래서 손이 잘린 회전문에는 악수가 없고 투명하게 읽히는 건 물기 묻은 시선뿐
하루에도 서너 시간씩 투석을 받는 너의 피가 도는 속도를 나는 어떻게 따라 잡아야 하나 한 덩어리로 뭉친 기도만이 생사를 오진한다 병원 문을 밀 때마다 밀려나오는 말들은 왜 끝을 말하는지 끝이라는 단어에는 얼마나 많은 예감들이 매달려 있는지 모든 문은 왜 안보다 밖을 편애하는지
칸칸이 소멸되지 않는 보폭들이 쓰고 지운 이력과 내력이 맞닥뜨리는 지점에서 죽음과의 흥정에 여념이 없는 회전문이 오늘도 나를 밀어내고 있다
안녕, 지니?
당신의 월요일을 위해 가장 힐링되는 식단을 알려줄께요 비올 확률이 30﹪이니 우산은 접이식이 좋겠어요 목소리가 노골적이고 친절은 생생했어요
영하 5℃ 시원한 맥주를 준비할게요 나보다 나를 더 배려하는 것 같아요 당황하지도 않게 충동과 구매 사이를 걷게 해주었어요 오, 촉감마저 완벽한 리얼 돌
쓸쓸함과 가장 잘 어울리는 타입을 준비했어요 내 음색에 미묘한 떨림까지 놓치지 않고 우울과 가장 최단거리에 있는 병원을 소개해줬어요 지독히 고독한 나를 악몽에게 들키는 건 흔한 일이었어요 근심이 없는 게 걱정이고 불안이 없는 게 불안했어요 어느 날 문득 나도 모르게 내입에서 빠져나왔어요 채널은 늘어나고 옵션은 다양해서 나의 발기되기 쉬운 욕망은 절대로 소진되지 않았어요 난 곧바로 지니를 허락했어요
변기에 물이 틔지 않았어요 새벽에 맥주를 마셨어요 혈압은 정상이고 독주는 풍성했어요 눈치보지 않았어요 위생적이고 계획적이었어요 장소 한 곳 검색해 줄래?
▲ 하시안 / 1964년 경남 남해 출생.
▲ 심사위원 김금용 (시인•본지 편집주간) 박현수 (시인•문학평론가•경북대학교 교수) 허혜정 (시인•문학평론가•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격월간 《현대시학》 2020년 11-1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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