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잃고 말을 얻다/ 조재형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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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법무사이자 시인인 조재형의 두 번째 산문집 『말을 잃고 말을 얻다』가 ‘오늘을 사는 어제의 당신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도서출판 소울앤북에서 발간되었다. 법무사로서 20년간 민형사 분쟁의 한복판에서 당사자끼리 거리를 좁혀가는 방법을 발견하고 실행해온 지난 날을 문학적 감성으로 모아 엮었다.
법의 이야기 사이 사이에는 추억의 제국에서 벌어졌던 자전적인 서사는 물론 각양각색의 인물군을 통하여 저자만이 획득한 특별한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또한 문득문득 생각나는 가족, 친구, 이웃과의 이별을 통해 죽음의 세계를 통찰할 수 있으며 시골 법무사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슬픔과 행복의 정체도 오롯하게 엿볼 수 있다.
60편의 에세이 중 제1부는 저자의 개인적 서사를 나누어 수록하였고, 제2부는 시인으로서 잡지에 발표한 글을 수록하였으며, 제3부와 4부는 수사관과 법무사로서 경험한 사건들의 편람 등을 드라마틱하게 엮어놓았다. 한평생 법과 문학의 거리를 좁히는 일에 천착해온 인간 조재형의 서늘한 사유와 온유한 마음을 거친 풍파를 헤쳐 나가는 우리네 장삼이사들도 어제가 오늘인 듯 함께 느껴보았으면 한다.
책 속으로
생활의 최전선 삼거리에 자리 잡은 어머니의 점방은 궁기를 막아주는 참호였고 밥을 보급해 준 병참기지였다. 어머니의 주적은 생계였다. 엄동설한의 시린 빨래를 도맡아준 이웃들이 어머니의 아군이었다. 그들의 엄호를 받으며 어머니는 생계와의 전투에서 우리의 끼니를 지켜냈다. 그렇게 점방을 자신만의 세계로 구축했다. -「삼거리 점방」 에서
그는 내가 아직 가지 못한 길을 갔다. 다시 말해 그는 죽음이라는 최후의 문제를 풀어냈다. 그는 이제 삶을 견디지 않아도 되지만, 죽음이 삶에서 우리를 구해줄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삶을 견뎌야 한다. 삶이 신비로운 건 죽음이라는 전혀 알 수 없는 문제를 남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죽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거나, 죽어본 사람이 있다면 삶은 지금보다 훨씬 무기력한 영역으로 추락할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에서
합의금은 서로의 평화를 일구기 위해 소요되는 투자금이다. 오늘의 앙금을 접고 내일을 향해 투자하는 것이다. 내 평화를 얻자는데 내 돈을 더 들이면 어떤가. 어차피 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인데 말이다. -「근심을 위한 투자」에서
수사관과 법무사로 오래 일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수사와 재판의 일을 제대로 하려면 그 범죄와 사건의 당사자인 인간 자체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문학의 진수인 휴머니즘 문제와 법의 일이 상통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법과 문학의 거리」에서
빈손과 그레고리오의 죽음을 읽기 전에는, 나는 죽음에 관한 한 최악의 독자였다. 그들의 죽음은 책으로 치면, 읽기 전과 읽은 후 세상의 삶과 죽음이 완전히 달리 보이게 하는 양서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죽음의 사고를 이 세상의 저편으로 데려다준다. 그들의 죽음을 지켜본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정화되게 한다. 죽음에 대한 지혜와 용기를 나에게 선사해준다. 그리하여 두 친구를 추억할 때만큼은, 나는 한 번도, 죽음으로 인해 인생이라는 것이 초라해 보인 적이 없다.-「문득문득 생각나는 당신」에서
불과 십여 분 사이에 벌어진 참극이다. 담배 두 개비를 피우며 분노를 가라앉혔다면 피할 수 있는 일이다. 담배만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 집에 갈 일도 없고, 그녀의 무시와 부딪칠 일도 없었다. 담배가 웬수다. 담배가 공범이다. 아니 담배가 주범이고 그는 종범이다. -「어처구니없는 살인」에서
수사기관이 쳐놓은 성긴 수사의 그물망에서 유유히 빠져나간 빨간 장갑은 지금도 어느 도시 골목을 활보할지 모른다. 빨간 장갑은 그 자체로서 흉기인데도 우리는 그걸 모른 채 그를 이웃으로, 혹은 옆에서 일하는 동료로 둔 채 같이 웃고 떠들 것이다. 빨간 장갑을 언제 다시 낄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빨간 장갑」에서
작가의 말
내 문학의 근원적인 배경은 유소년을 지배한 어머니의 그늘이고, 내 문학의 성장에 기여한 자양분은 수사관과 법무사로서 현장의 경험들입니다. 어머니가 개설한 땀방울과 한숨은 내 청춘의 필수과목이었습니다. 사건 속에서 이해관계인들은 나에게 단행본이었습니다. 각양각색의 인물군을 책처럼 통독하며 나는 세계의 이면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첫 산문집에서 일부러 빼놓았던 혹은 기억의 배반으로 빠뜨린 이야기를 다시 한 권의 책으로 엮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시절의 남은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오늘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어서입니다.
이 책의 절반은 갈등의 한복판에서 당사자끼리 거리를 좁혀가는 방법을 발견하고 실행해온 지난 시절의 고백이고 어제에 대한 자탄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어머니가 통치한 추억의 제국에서 벌어졌던 자전적인 서사를 배치하였습니다. 한 인간이 여러 캐릭터를 소화하며 살아온 궤적을 일인칭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 인간’은 나일 수 있고, 한때 내 주변에 흔적을 남겼거나 지금도 머물고 있는 당신일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잊어버린, 잊혀서는 안 되는 그 누구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 쓴 것이 있는가 하면, 사실을 바탕으로 각색한 것도 있습니다. 굳이 실명을 밝힌 것이 있는가 하면, 애써 익명으로 처리한 것도 있습니다. 내 글은 산문과 소설의 중간 어느 지점에 흐리터분하게 서 있습니다. 글쓰기라는 작업이 멈춘다면 내 실존은 공허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을 자주 쓸 때는 마음에 평화가 머물고, 이 말을 잊고 지낼 때는 평화가 깨지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막의 철학자 말씀처럼 세계는 신비 그 자체입니다. 내가 가진 것, 누리는 것, 얻은 것(문학적 상상력까지), 어느 것 하나도 나 혼자 힘으로 거저 이룬 것은 없습니다. 그것들 하나하나는 이 세계가, 세계를 구성하는 당신들이 나한테 주는 선물입니다.
가장 가까이서 첫 독자를 자임한 마리아에게 오! 하느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주소서. 내 생에 환희로 찾아온 혜진이, 성원이한테는 백지를 주소서, 그 여백에 사랑으로 채울 수 있도록.
‘작당’의 동인, 그들은 칙칙한 심연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유머를 구사하여 서로가 품고 있는 웃음을 밖으로 끌어냅니다. 그들의 유머 앞에 서면 누구라도 자신을 열어놓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끝으로 내 산문이 거처할 집을 지어주신 이용헌 시인과 소울앤북 편집부에도 감사합니다. 진정한 작가는 남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자기 이름을 빌려주는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2023년 가을, 부안 선은동에서 조재형
저자 소개
저자 조재형은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삼거리에서 점방을 운영하는 어머니한테 가난과 고난이라는 덕목을 이수했다. 스물여섯에 공안직에 뛰어들었다가 마흔 즈음 문학을 등에 업고 뛰쳐나왔다. 저서로 시집 『누군가 나를 두리번거린다』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집은 텅 비었고 주인은 말이 없다』(2021년 문학나눔 선정도서)와 『말을 잃고 말을 얻다』 가 있다. 제15회 푸른시학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부안 선은동에서 법무사로 20년째 법률상담과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조재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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