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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으면 떠오르는 이름을 지우는 시간이 길 때 딴생각을 해 - 신진향 시인 / 모던포엠 출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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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金富會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14회 작성일 22-08-29 11:07

본문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일상성


-신진향의 시세계



송명희(문학평론가, 부경대 명예교수)



1.


20C 후반 거대담론이 무너진 자리에 새롭게 떠오른 것이 일상성이었다. 일상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사조와 맥락을 같이하며 민족, 정치, 전쟁과 같은 거대담론을 대체하는 새로움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의 일상성을 다양한 층위에서 설명하였다. 그는 인간이 처한 실존의 구조를 현존재와 세계-내-존재로서의 존재자의 틀로 분석하였다. 하이데거가 일상성에 대해 철학적으로 주목한 이래, 일상성은 인류학·사회학‧역사학·문예학을 비롯하여 여러 학문에서 다양하게 조명되었고, 특히 예술작품들에 반영된 일상성에 대한 분석은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사회학적으로 ‘일상성(quotodiennete)’이 개념화된 것은 프랑스 사회학자 르페브르(Henri Lefèbvre, 1901-1991)에 의해서이다. 그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에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일상성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생산과 실천의 관점에서 일상성을 바라본 르페브르는 마르크스로부터 일상성의 개념을 영향받았다. 그에 의하면 일상성은 지배계급과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소외된 공간이다. 즉 삶과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개인의 자유와 창신력을 상실한 공간이다. 그 소외된 공간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새로운 일상적 삶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것이 그의 일상성 이론의 핵심이다. 따라서 그의 일상성 비판은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일상성의 공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비판적 기획 아래 이루어졌다.

르페브르가 일상성에 대한 자본주의적 침식을 비판하고, 일상성을 다시 근원에서부터 회복시키기를 지향했다면, 마페졸리(Michel Maffesoli, 1944- )는 오히려 일상성을 존재의 시원이자 근원으로 긍정한다. 이러한 입장은 그의 현재주의적 관점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동시대를 진보가 약속하는 미래를 믿기보다 현재 자체, 즉 순간을 긍정하는 시대로 규정한다. 그는 손에 닿는 것, 일상적인 것, 가정적인 것, 가까이 있는 것, 즉 우리의 가장 구체적인 실존 속에서 이를 바탕으로 현재의 속박들을 이겨낼 창조적 힘을 길러낸다고 했다.


2.


신진향의 시를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일상성이었다. 그것도 일상성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르페브르와는 달리 일상성을 긍정한 마페졸리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유들이 떠올랐다. 그의 시의 내용을 읽기 전에 제목들만 살펴보더라도 시적이기보다는 비시적이고 일상적이다. 몇 개만 예로 들어보면 젓갈 레시피, 로즈마리 키우기, 그깟, 못, 미역국을 삼킨다는 건, 쿠키타임, 막걸리, 콜라를 좋아하세요, 밥의 설법, 공깃밥은 한 숟가락이 꼭 부족한가, 타로술사 등등…….

일상성은 보통사람이 살아가는 나날의 삶, 보통의 것, 일상적인 것이며, 반복성·연속성·항상성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또한 일상성은 반복, 재생산, 루틴(routine), 전통과 같은 의미도 담고 있다. 일상성은 일회성, 생산성, 혁신과 같은 비일상성과는 대비되는 의미를 가지지만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이 없으면 사회는 유지되지 못한다. 개인의 일생이 바로 나날의 일상적 삶의 연속이듯이 사회 역시 그 구성원들의 일상생활과 사회 각 구성 요소의 일상적 과정이 되풀이됨으로써 존속되어 간다.


그럴수록 내장을 싹싹 발라야 해


구두 뒤축 물러앉도록 헤엄쳐 다닌 지느러미까지

간이고 쓸개며 허파까지 뒤집어 소금 치고

패랭이 채송화 맨드라미 붉은 성기들이

박장대소하는 여름을 건너가는 사이

낯 간지러움에 웃지 못하게

싹싹 비벼 놓는 거야


집을 나설 때 아가리 속에

차곡차곡 어제의 내장들을 쌓아둬

상처 따윈 상관없는 것처럼

두꺼워지는 얼굴을 입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처럼

그대를 만나지 못한 어제처럼 싱싱해지기


뼈가 무른 족속이라 해도 상관없이

속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끄떡없이

나는 길을 헤엄쳐, 꿈을 꿔 날아올라

상기된 볼 붉어지는 독

입을 열면 삭지 않은 말이 나올까 두려워

세 겹 광목으로 칭칭 동여매

당신들의 조언이 나를 잊게 할까 겁내지 않을 거야

뚜껑이 열려도 숨 쉬는 호흡기를 지닌

오랜 시간이 있으니

뼈를 넣고 대가리를 디밀어


난 우묵한 장독으로 들어가 앉아

소금 한바가지를 지르고

밑이 가려워 시간을 비벼대

닳고 닳고 부풀다 사라진 날 것의 이름

기억이 온전치 않았다 변명치 않고

기어이 다 녹여 낼 테야

냄새나는 몸뚱아리라도 어쩔, 찬바람에 드는

밑동 눈을 감고 생각해

샛 노랗고 하얀 그 곳에 닿을

샛, 파란에 닿을


우습게 보지마

진짠 말이지 곰삭은 액체의 뼈 맛

그 안에 들어서면 같이 어우러져

흔적도 없는 컴컴한 수도사의

기도 같은 거야


네가 잘 있기를 바라는

이름 따윈 뭔 상관

-<젓갈 레시피> 전문


음식은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일상생활의 중심이 되어 왔다. 인간 존재의 기본적 삶인 의식주의 하나가 바로 ‘식(食)’이다. 즉 음식 또는 음식 먹기는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며, 일상적인 삶의 토대이다. 우리는 생명 유지를 위해서도, 노동을 위해서도,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도, 나아가 자신의 차별화된 지위와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도 음식을 먹고 식당에 간다.

특히 현대에 와서 음식은 단순히 생명 유지의 차원을 넘어서서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의 기호와 문화적 취향, 그리고 그 사람의 사회경제적 능력과 지위를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기호가 되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가 그의 저서 『소비사회』에서 주장한 바를 빌려 표현하자면 현대는 생명 유지와 허기 충족, 영양소 공급의 필요성이라는 사용가치 때문에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계층) 사람들과 차별화된 지위를 구별짓는 기호와 이미지 때문에 음식을 먹고 소비하는 시대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일상성과 반복성을 가지며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계절에 따라 김장을 담그고, 간장 고추장 된장을 담그고, 지방에 따라서는 젓갈을 담그는 일들을 개개의 가정에서 수행해 왔다. 어디 그뿐인가? 명절과 절기에 따라 만들어 먹는 음식도 달랐다. 그리고 의례에 따라 상차림이 달라지고, 제철음식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젓갈, 또는 젓갈 담그기와 같은 것이 시적 소재가 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낯설고 신선하다. 일상에 대한 긍정적 관심이 없었다면 채택될 수 없는 소재인 것이다. <젓갈 레시피>는 직접 젓갈도 담가보고, 그것이 곰삭아가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시이다. 젓(젓갈)은 새우ㆍ조기ㆍ멸치 따위의 생선이나, 조개ㆍ생선의 알ㆍ창자 따위를 소금에 짜게 절이어 삭힌, 일종의 발효식품이다. 젓갈 담그는 일은 소규모의 가내공장에서 제품으로 생산되는 경우가 많지만 과거에나 지금도 그 일은 각 가정에서 여인네들이 담당해왔다. 즉 젓갈을 담그는 일은 특정한 철이 되면 여인들이 수행하는 친숙한 노동의 하나였던 것이다. 시인은 젓갈 담그는 방법, 즉 레시피를 단순히 나열하여 적어놓은 것이 아니다. 젓갈 담그는 과정에서부터 그것이 곰삭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시인은 그것이 가진 의미에 꼼꼼히 관심을 가진다. 그것이 마치 우리네 인생의 모습을 닮았다는 듯이…….

젓갈(만들기)이라는 기표를 통해서 시인은 “우습게 보지마/ 진짠 말이지 곰삭은 액체의 뼈 맛/ 그 안에 들어서면 같이 어우러져/ 흔적도 없는 컴컴한 수도사의/ 기도 같은 거야”라는 기의를 산출해 낸다. 곰삭은 젓갈의 녹아 있는 액체의 깊은 맛, 그 안에 들어서면 같이 어우러져 흔적도 없어지는, 너와 나의 경계조차 사라지는 혼융일체의 그 맛을 시인은 ‘컴컴한 수도사의 기도’에 비유하고 있다. 즉 젓갈의 곰삭아 가는 과정, 또는 곰삭은 젓갈의 맛이란 마치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삭히어내며 오직 기도에 정진하는 수도사와도 닮았다고 파악한 것이다. 어찌 수도사의 기도뿐이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인생을 알아간다는 것, 세월을 살아낸다는 것이 젓갈이 발효되는 과정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탁월한 인생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


일기예보가 계절의 전부는 아니야,

사건이 진실 일리는 없잖아, 꽃잎 한 장을 붙이고 살뿐


비탈에 젊은 여자가 산다고 말이 돌았다

북으로 난 창에 비친 오후의 얼굴이 홍조가 든 것이

필시 누가 다녀갔을 거라고 했다

그날부터 마을의 몇은 몸을 사렸고

누수가 기침처럼 터지는 보일러를 끼고

네 탓이 아니야, 그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세월의 무게 같은 거라는 위로를 검정테이프로 묶었다

그녀가 택한 고요한 사랑의 기술은 종종

후배위를 좋아한다든가

올라탔다든가 그림자도 불러 세우는 기술이 있다든가

휘날리는 버드나무

봄바람처럼 날아다녔는데

그래서 다들 그쯤은 붉어져도 괜찮을 거라고

산 아래 동네도 온통 집마다 붉었는데

나뭇가지처럼 마른 손목은 오후의 햇살도 버거워서

창에 비치지 않는 날이 잦았다

말들의 끝에서 그녀는 사라졌고

비탈을 올려보는 어떤 계절이 와서

정숙한 듯 조용한 길을 걸을 때면

낙엽처럼 혼자 붉던 치맛자락을 떠올리는데

그녀가 남긴 홑잎의 아이 소식도 소문처럼 먼데

보일러 배관에서 낙숫물 소리가 들려

나비처럼 맨 테이프를 보다가

그녀가 사랑한 방식

그것도 괜찮았다고 또 버스럭거렸다

-<언술> 전문


<언술>이란 시는 언덕 비탈에 혼자 살고 있는 젊은 ‘그녀’를 둘러싼 소문에 대해서, 그 소문이 어떻게 산 아래 동네 사람들에게 퍼졌으며, 그것이 진실 여부와도 상관없이 그녀를 어떻게 소외시키고 있는가를 진술하고 있다. 소문이란 진실성 여부에 상관없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사실이나 정보를 말한다. 따라서 <언술>이란 시의 이탤릭체로 쓴 프롤로그의 “일기예보가 계절의 전부는 아니야,/ 사건이 진실 일리는 없잖아, 꽃잎 한 장을 붙이고 살 뿐”에서 ‘일기예보’라는 단어나 “사건이 진실일 리는 없잖아”와 같은 논평적 진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기예보는 그저 예보일 뿐이다. 그것은 맞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이 한 계절 날씨의 진실을 전부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사건 역시 그 사건의 진실을 모두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녀를 둘러싼 소문들의 진실 여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마을에는 혼자 사는 젊은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소문들이 스캔들이 되어 떠돌고 있다. “북으로 난 창에 비친 오후의 얼굴이 홍조가 든 것이/ 필시 누가 다녀갔을 거라고 했다”는 소문은 그녀의 집에 누가 다녀간 것을 본 것 때문이 아니라 북창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든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그녀의 집에 누가 다녀갔다 하더라도 그 사건과 그녀 얼굴의 홍조 사이에는 사실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더욱이 그것이 스캔들이 되어 마을에 소문으로 떠 돌아야 할 개연성은 없다. 그럼에도 소문은 그녀가 “후배위를 좋아한다든가/ 올라탔다든가 그림자도 불러 세우는 기술이 있다든가”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 급기야 그녀의 성적 체위나 이성을 유인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등 악의적으로 조작, 왜곡, 확대, 재생산되어 나간다.

한스 노이 바우어(Hans J. Neubauer)는 『소문의 역사』에서 소문(rumor)은 어원적으로 소식, 비명, 외침, 평판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카오스, 대참사, 범죄 등의 의미와도 관련을 맺고 있으며, 강간, 도둑질, 강도, 살인, 타살 등과도 유사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여성에 대한 소문이 유통되고 소비되는 방식은 성별화된 위계질서를 지지하는 지식과 권력의 긴밀한 공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소문은 어떤 실체를 이미지화하여 통제하기 쉬운 대상으로 만드는 특성이 있다. 만약 마을의 누군가와 그녀가 관계를 맺은 것을 비난해야 한다면 그녀만이 아니라 누군가인 그 남자에게도 동시에 향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네 탓이 아니야, 그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세월의 무게 같은 거라는 위로를 검정테이프로 묶었다”처럼 봉인된 채 소문의 치명적 상처는 오로지 그녀를 향해 있고, 그녀만이 “말들의 끝에서 그녀는 사라졌고”처럼 소외된다. 시인은 <언술>에서 인간세계를 지배하는 소문의 정치학에 대해서, 즉 소문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며, 그녀라는 삼인칭의 여성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히며 희생자로 만들어가는가를, 그리고 소문이 확대 재생산 되는 방식을 “누수가 기침처럼 터지는 보일러를 끼고”와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비유를 통해서 진술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진실을 확인할 수 없는 수많은 소문들, 특히 여성을 둘러싼 섹스 스캔들은 진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관음증을 자극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산, 재생산되는 구조가 존재한다. 그 속에서 소외되고 피해자가 되는 것은 성차별적인 사회의 여성일 수밖에 없다. 시인은 피해자인 그녀의 입장이나 가해자인 마을 사람들의 입장이 아닌 삼인칭의 객관적 시점으로 이를 시화함으로써 오히려 피해자인 ‘그녀’의 입장을 강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4.


명절 설거지 끝

물 한잔에

이십 년 산 정이 떨어지고


장롱 밑 둘둘 말아 건져낸

먼지 뭉치보다 가벼운 것들이


재활용 박스를 접다가 손이 베이고

떨어진 치마 단추 임시방편 옷핀에 찔려

피를 철철 흘리고


버려도 아쉬울 것 없는 미련 때문에

살았다 죽었다

밤을 새웠다 붙이고


흘려 넘긴 귓등으로

당신은 멀어지고

골목이 사라지고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무너지고

-<그깟> 부분


‘그깟’은 “겨우 그만한 정도의”란 뜻을 가진 ‘그까짓’이란 관형사의 준말이다. 이 말 속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 뭐 대단한 것이 아니라 별거 아닌 것이라는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이십 년을 산 부부가 정이 떨어지는 계기도 명절 설거지 끝의 물 한잔과 같은 사소한 것 때문이다. 물 한잔이나 장롱 밑의 먼지, 옷핀과도 같은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을 귓등으로 흘려 넘긴 탓으로 “당신은 멀어지고/ 골목이 사라지고/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무너지고”와 같은 거창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따라서 그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을 ‘그깟’이라고 귓등으로 흘려 들으며 무시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 하찮은 그까짓 것들이 있기 때문에 세대가 늘고, 세월이 붙고, 거리가 좁아진다. 따라서 일상성이란 무시해도 되는 하찮은 것이 아니라 거창한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는 지극히 구체적인 것이며, 삶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르페브르는 『일상생활 비판』에서 “가장 기막힌 것은 가장 일상적인 것, 가장 이상한 것은 가장 사소한 것 (…) 가장 사소한 것이 가장 기막힌 것이 될 수 있으며 습관적인 것이 ‘신화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깟>이라는 시는 그깟과 같은 진부하고 사소한 일상적인 것들이 거창한 사건, 역사와 같은 거대담론으로 연결될 수 있는 관계성에 주목하며, 개인들은 구체적이고 사소한 일상에 무신경하지 않고 그것들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할 당위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5.


가족이 가죽으로 바뀌어 읽히는 때가 왔다

어떤 저녁 모임이나 후의가 몸에 붙은 말로 바뀌는 때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늙은 짐승의 가죽 가방이 되었다는 게


나이든 사람으로 간략히 지퍼를 닫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

요긴한 치레의 관계성보다 더 빨리

납득시킬 말이 몸에 살았다니


모호하게 보이는 것과 더딘 저녁이 벗어놓고 간

초저녁잠에 잠깐 취했더니

새벽 오기가 한참이라서


적망的望을 쓴다고 해도

적막寂寞으로 읽을 것이라

원 없이 사랑했었다고 그런 때 있었다고

써 놓았다, 적막한 아침같이 뭉개지는 신문활자

일생 너를 속이고 나를 속여

-<노안> 전문


인간은 태어나서 일정 기간 성장한 후 나이가 들면서 점차 신체적, 인지적으로 쇠퇴하여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밟게 된다. 따라서 노화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과정이다. 모든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불가피하게 흰머리가 생기고,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감각이 둔화되며, 등이 휘며 신장이 줄어들고, 자극에 대한 반응속도가 감소하는 등 신체 기능이 점차 떨어진다. 사람들마다 자신의 노화를 인지하게 되는 순간은 각기 다를 것이지만 어느 날 아침, 신문의 활자가 흐릿해지며 ‘가족’을 ‘가죽’으로 잘못 읽게 되는 노안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진적으로 눈의 조절력이 떨어지고, 돋보기안경을 써야만 독서가 가능해지는데, 그걸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처럼 감각기관의 둔화와 직결되어 있다. <노안>의 화자는 “가족이 가죽으로 바뀌어 읽히는 때가 왔다”라고 자신의 노화를 인지하게 된 충격적인 순간을 담담한 듯 진술한다. ‘가족’이 ‘가죽’으로 읽히는 그것처럼 자신의 노화를 확실하게 자신에게 납득시킬 신체언어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적망(的望-후보의 대상으로 적당함, 또는 그러한 사람)’이 ‘적막(寂寞)’으로 읽히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 노화, 즉 노안 때문만은 아니다. 적막은 일차적으로 고요하고 쓸쓸하다는 의미에서 나아가 의지할 데 없는 외로움을 뜻하는 단어이다. ‘적망’이 ‘적막’으로 읽히는 것은 생물학적 노화의 의미를 넘어선다. 나이를 먹으면 생물학적인 노화만을 겪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은퇴를 강요당하면서 사회적으로도 고립된다. 사회적 고립은 외로움의 느낌, 타인에 대한 두려움, 부정적인 자존감 등을 야기한다. “적막한 아침같이 뭉개지는 신문활자”가 지시하는 바는 아침이라는 시간에 절대 적막해질 수 없었던 젊었던 시절과 대비되는 사회적 고립을 의미한다. 즉 출근 준비를 위해 허둥지둥 분망했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노년의 아침은 그저 적막하다. 왜냐하면 출근해야 할 직장도 없고, 급히 가야할 곳이나 오라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즉 노년의 사회적 단절과 고립이 적막한 아침을 만드는 것이다. 노년의 화자는 아침에 일어났지만 가야 할 곳이 없어 배달된 조간신문을 손에 들고 읽어보지만 활자가 뭉개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저 외롭고 쓸쓸하고 적막한 아침 시간에 처해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죽음을 의미한다. 시인은 ‘적막’이라는 시어를 통해서 생물학적 노화를 넘어서는 노년의 사회적 죽음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이렇게 적막한 노년을 한동안 보내다가 인간은 “누우면 한 평이었다/ 사랑하던 사람을 기억할 것도 한 장이었다/ 무릎 닳도록 산 날이 항아리 하나에 담겨 나오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죄 한 시간 남짓”(<극락전을 지나다> 부분)과 같은 생물학적 죽음을 맞는다. 죽음은 이 시에서처럼 나의 죽음이 아니라 타인의 죽음으로 경험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누우면 한 평”의 평등한 공간을 차지하는 일이고, 단지 한 장의 영정사진으로 남는 일이고, 유골항아리 하나에 담겨지는 일이고, 화장장에서 단지 한 시간 남짓 기다리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나 무로 환원되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현상이다. 죽음도 노화와 마찬가지로 일상의 일부분이고, 삶의 과정에서 진행되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화자는 불교에서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을 지나다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끝없는 사유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제1, 2행을 제외하고 제3행부터 마지막 행에 이르기까지 종결어미가 없이 계속 이어지는 진술 형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한 평의 누울 공간과 한 장의 영정사진처럼 인간의 죽음은 간단명료한 현상일 수 있지만 주체인 자아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결코 간단명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의 수많은 역정과 사람들과의 애증의 관계, 그리고 희로애락의 기억과도 연결된 삶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한 사람의 일상생활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게 만드는 일이다. 개체로서의 인간은 사멸하여 사라지지만 자손의 유전자를 통해 생명은 영속되며, 살아 있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기억되는 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불교적 의미에서는 서방정토에서 일체의 고통이 사라진 영원한 열반을 얻지 못하는 한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음 생에서 또 다른 삶이 계속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의 진부한 일상이 반복될 것이다.*


신진향 시인


2019 모던포엠 신인상

모던포엠 작가회 회원

시나무 동인

경희 사이버대학 문창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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